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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화대.,`석주길 개척 비화(秘話)`& 동판.

dolbaw 2018. 9. 3. 20:42

설악산 여행 

                                                              


 천화대.,'석주길 개척 비화(秘話)' & 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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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대 의 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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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천화대.,석주길 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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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빛 그리움이 흐르는 저 너머에

솜다리가 아름다운 잦은바윗길이 있다오.

우리사랑 여울지는 골짜기에 별이 오르면

밤하늘엔 미리내만 추억으로 남아 있다오


이별이 아쉬워서 눈물을 흘릴 때

산울림도 퍼져간다오

이별이 있는 곳에.” 


이 노래는 ‘적막가’ 2절

적막가는 작자 미상 산노래.

갈매빛(짙은 초록빛, 진 초록)


적막가는 1절 가사만 전해졌으나

1980년대 초반 이 곡이 유행한 이후에

한국트레킹학교 윤치술 교장이 2절을 작사.


"당시 천화대 리지 등반을 즐겨 다녔어요.

등반이 끝나면 잦은바위골에서 야영했죠.

그때 쓴 시를 적막가에 붙여 2절로 불렀어요."


"벌써 30여년이 지났는데 지금 산악인들 사이에서

이 적막가가 애창되는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잦은바위골~잦은바위 좌측 사태골~칠형제봉~토끼바위~피카츄 바위~100미터 폭포 상단~100미터 폭포~50미터 폭포~잦은바위골 

                                                                잦은바위길., 사태골

잦은바위골~잦은바위 좌측 사태골~칠형제봉~토끼바위~피카츄 바위~100미터 폭포 상단~100미터 폭포~50미터 폭포~잦은바위골 


1980년대 윤 교장은 설악산을 자주 오갔다.

천화대 리지를 비롯해 석주길, 잦은바위골 등.

1985년 여름은, 윤 교장이 스물아홉 살 시절이다.


[이 한 장의 사진 | 한국트레킹학교 윤치술 교장] "등반하고 시 짓고 노래하고.. 설악산은 삶을 배우는 산이었습니다"   


석주길 능선에서 희야봉 못미처.,40m 하강루트.

천화대., 석주길 동판 아래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사진 하단 초록색 동판이 바로 그 석주길 동판이다.


“하강을 마치면 범봉 앞 V안부로 내려서요.

곧장 바로 붙으면 범봉, 그 뒤로는 공룡능선,

왼쪽으로 내려가면 잦은바위골, 오른쪽은 설악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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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천화대는 20여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암릉.

천불동계곡의 지류인 설악골과 잦은바위골을 가르며

비선대 부근까지 흘러내린 이 바위 능선에는.,석주길.

염라길,흑범길 등 유명한 암릉 리지등반 코스가 있다.


천화대(天花臺)에 우뚝 솟아오른 범봉은

설악산 '암릉의 상징'이라 할 만큼 수려하다.

'공룡능선에서 중간지점' 1275m봉 아래가 범봉.


자칫 잘못 내려서면

'삶과 죽음의 경계선'

조난사고 겪기 쉬운 곳.


1275m봉은 공룡능선 한가운데 있는.,공룡릉의 상징.

'1275m봉~마등령' 2 km, & '1275m봉~희운각' 3.1 km.

1275m봉에서 범봉으로 내려서는 바위길은 아주 가파르다.

 

1275m봉 지나서 첫번째 암봉이.,노인봉(1,120m).

급경사지대를 내려서면 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노인봉 북동쪽으로 뻗은 암릉이., 천화대(天花臺). 


희운각에서 공룡능선을 오르다 보면

신선대에서 천화대 자태를 볼 수 있는데

삐죽삐죽 쏟은 위용이 하늘로 치솟는 바위꽃.


'외설악의 속살' 천화대로 들어가려면

사전에 관리공단 등반허가를 받아야  한다.

천화대에는 '천화대리지,흑범, 염라, 석주'.,길.


석주길은 설악골에서 시작하여

희야봉에서 천화대리지와 만난다.


치솟는 봉우리들을 수없이 올라.,범봉.

범봉에서 3번 하강을 하면 석주길은 끝난다.

석주길은 설악좌골로 하산하면.,원점회귀산행.


비선대산장에서 새벽에 눈뜨면

석주길은 당일 등반도 가능하다.

새벽 4시 출발 후., 약 15시간 소요.


석주길은 대부분  암봉은 뾰족하고

날카로운., 칼날능선(나이프 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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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44살에 필자가 난생 처음으로 찾았던 천화대.

왕관봉까지 올랐다가 그곳에서 잦은바위골로 하산했다.

저항령계곡 야영장에서 5박6일 하계등반 캠프 일정이었다.


필자가 그곳 야영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본의 아니게, 저항령 하계캠프 단장으로 뽑힌 것.

그래서, 큰형님이 되어 저항령 야영장 질서를 담당.


그당시, 여러 산악회가 합동 하계캠프를 열면

가장 중심 축 웃어른 큰형님이 단장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 산악인들 간에 전통적으로 통용되는 관례.


큰형님 텐트는 곧., 저항령야영장 중앙 사령탑.

사령탑 중심으로.,남녀 야영장 구역이 양분된다.

특히, 여자 야영장은 남자에게는 신성불가침 구역.


연인 사이일 경우에도

단장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사령탑 인근에 연인 텐트를 설치.


하계켐프 사령탑과 연인 텐트 사이

저항령야영장에서 한가운데 있는 공터는

그곳 남녀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유일한 공간.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악인들의 등반 캠프는

지켜야 할 규칙이 엄격한 편.


산악사고 예방 목적으로

선후배 사이도 엄격하지만

남녀 간 지킬 룰도 엄격한 편.


연인 사이라도

텐트 안에서

합방 금기.


그해 독박골 야영장 폐쇄 후,

그곳 대신 열린.,저항령 야영장.

'밤마다 설악산에 관한.,이야기꽃.'


인제(麟蹄)군의 상징처럼 소문난 북면 원통리(元通里).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전설의 고향.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이 대세는 왕건에게 기울자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 행렬.

인제, 원통골에 이르자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고 하던 말.

 

독박골, 다물함병골은 신라 마의태자가 스쳐간 곳.

'마의태자 옛 영토 회복'.,그 의지가 담긴.,다물(多勿).

그 인근에는 '마의태자'에 관한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의태자 갑옷 병사들이 주둔했다는 갑둔리(甲屯里),

마의태자 거처.,왕골(王谷), 옥새를 감추었다는 옥새골.

'마의태자' 신을 모신 북서쪽 산에 있는 대왕당(大王堂).


마의태자가 스쳐간 곳마다.,흔적 지명들.

그 밖에 밀림 속에 버려진지 오래된 능묘(陵墓),

충신상, 문무석상 등이 사학자 손길을 기다리는 곳.


1950년대 저항령 고지와 계곡 일대는 6.25 격전지.

1993년 여름 저항령계곡 야영지는 야생동물의 천국.

DMZ 지뢰밭에서 평화와 자유를 찾아 온., 야생동물들.


발목지뢰 흔적인듯한.,절름발이 노루.

야영장 안으로 겁없이 침범한.,고슴도치.

그리고, 깊은 밤 야생동물 울음 요란한 그곳.


우리 일행 12명은.,'4인1조' 3팀

각자 매일 희망 루트 팀으로 편성.

우리 일행 구성원은 '제5계절 산악회'


종로5가 등산장비점 직원들을 중심축으로

강북 산악회 등반대장들로 구성된 베테랑들.

그 후배들의 초대를 받아 하계여름캠프에 합류.


그곳 야영장에는 우리 일행 말고도

12명 남짓 더 있었기에.,합동등반 가능.

각자 희망 루트로 등반했고, 휴식도 가능.


첫날 장군봉, 둘째날 천화대, 셋째날 송지호해수욕장

넷째날 7형제봉, 다섯째날 저항령계곡, 여섯째날 울산바위.

마지막 날에는., 경포대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서울로 돌아왔다.


나를 비롯해 수영복을 갖고가지 않은 일행은

수평선 바다를 맴돌다가 삼각파도 속.,인명구조.

팬티 차림으로 낯선 처녀와 본의 아니게.,인공호흡.


'생명의 은인'이라고

후한 대접까지 받았다.


저항령골짜기 개울가 야영장에는

밤마다 야생동물들의.,단발마 비명.

여자는 개울 아래쪽, 남자는 개울 위쪽.


야생동물들 간에.,

'약육강식'의 현장.


야영장 둘레에 자일로 울타리를 만들어

코펠 등을 걸어 야생동물의 접근을 차단.

남자들은 교대로 밤샘 보초를 서기도 했다.


그후, 천화대 경관에 매료되어

여러 차례 천화대를 찾아 갔다.


그러면서, 용아장성 올릿지 등반.

그러면서, 권긍성 옆.,봉화대 리지.

신동인, 김형주 산악인 팀들과 동행


그러면서, 설악산에 깊이 빠져들었다.

'북한산 12성문 올리지'는.,8~9시간 루트.

설악산은 루트가 끝없이 많아 늘 새로웠다.


천번을 가도 다 못 오를.,천불동 암봉들.

죽을 때까지 다 못 오를.,설악산 암봉들.

오르다가 죽어도 후회없을.,알피니즘 천국.


[천화대]개요 


특히, 천화대 석주길 비화는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석주길에 관한 자료를 애정을 갖고 수집.

1993년부터 2006년까지 틈나는대로 자료를 모왔다. 


천화대.,'석주길 동판 & 개척 비화(秘話)'


이곳 자료 수집에만 14년 넘게 소요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확실히 아는 산악인이 없었다.

내가 만난 산악인마다 비화 스토리가 조금씩 달랐다.


그렇게 필자가 자료를 수집해.,2006년 쓴 글.

산행을 하다보면 - 천화대 '석주길 동판' 비화.

천화대 석주길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을 다시 쓰게된 이유는

2006년 후, 피에몽 산악인들을 만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베일 속까지

숨겨진 비화(秘話)를 더 많이 알게 된.,때문.


'봉정암 거사' 김재중 산악인.,비화.

수렴동대피소 산장지기 & 가야동선녀.

용아장성 14봉 동판에 관한.,까만돌 비화.


모두 다.,故 송준호 산악인과 관련 깊다.

즉, 석주길 비화가 곧 설악산 전설의 전설.

하여, '석주길 비화' 자료수집에.,올인(all-in).


故 송준호 산악인의.,지인들과 선후배.

故 엄홍석., 광성 고교 동창생들과 선후배.

고인들과 생전에 함께 등반한 산악인들 증언.


그래서, 기록으로

남겨 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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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훈련대 10동지 조난사고.

그당시 설악산악회장 이기섭 박사와 설악산 개발위원회

20 연봉이 구름 위에 핀 "하늘나라 꽃."같아 명명한.,천화대.


외설악 비경에 취해 마냥 행복한 클라이머들

비선대, 그 계곡 초입 장군봉. 삼형제봉의 적벽, 천화대

'불자에게 상상 속 성역이었던 곳마다 오늘날 클라이머 천국.


설악산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
솜다리꽃, 박새풀, 둥글레, 함박꽃, 전나무, 주목을 포함
흰 껍질에 연서를 쓰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자작나무. 

 

설악골, 독박골, 용소골, 토막골, 곰골. 잦은 바위골,
용아장성, 공룡능선, 화채능선, 서북능선. 칠형제봉. 
봉화대 울산바위 장군봉 적벽 삼형제봉 비선대. 천화대 .

 

'태풍이 불 때마다

출입통제 구역인.,바위길.

낙석 다발지역.,설악산 암봉들.'

 

'믿고 잡은 홀드가 터져나가기 십상.'

'해풍에 삭은 푸석바위 암각은 칼날 같다.'

'피부에 살짝 스쳐도 살점이 패여 깍일 만큼..'


수많은 산악인들이 바람처럼 사라져갔던.,설악산

그곳 수많은 암봉마다 산악인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마치, 그곳 바람과 구름은 산화한 산악인들의 영혼인듯.,


새해일출시간과 새해 해맞이 명소 추천  


소청과 중청까지 휘감는 바람과 구름,
대청봉에서 맞이하는 장엄한 동해 일출. 


☆2017년 (정유년) 설악산 대청봉 일출산행1박2일<준비중> 

                                                            설악산 대청봉.,신년 일출.


설악의 산노래들은 슬프고 애잔하다.
그중에서도 가슴이 찢어질듯 슬픈..설악가.
설악가는 석주길이 있어 더욱 더 애잔한 산노래.

 

석주길은 천화대 희야봉에서 설악좌골로 뻗어내린 암릉.

천화대는 공룡능선에서 흘러내린 설악골과 잦은바위골 사이.

공룡능선은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로지르는., 설악산의 주 능선.


외설악 공룡능선 

                                                            공룡능선 & 용아장성

내설악 용아장성(등반) 

 

내설악은 대청봉을 중심으로 서쪽 방향.,설악산 일대를 지칭.

한계령과 미시령을 경계로 서쪽(인제군)은 내설악이라 부른다.
용대리, 백담계곡, 수렴동, 구곡담, 가야동, 용아장성, 귀때기골.

 

특히, 가야동계곡은 연인들이 즐겨찾는 비경지대.

'나무꾼과 선녀' 전설처럼 사랑을 꽃피우는 목욕처.

뭇 연인들이 찾아와 부부의 인연을 맺는.,가야동계곡.

 

설악산 가야동 계곡 

                                                                              가야동계곡

설악산국립공원 가야동계곡 소개 !


외설악은 대청봉 주봉을 중심으로 동쪽 방향.,설악산 일대를 지칭.

천불동, 울산바위, 권금성,금강굴, 귀면암, 비룡폭, 오륜폭, 토왕폭 등.

'외설악 입구' 설악동에서 비선대 지나 천불동이 품고있는 암릉.,천화대.


천화대는 1967년 범봉이라 명명된 암봉에서 유래 .

공룡능선 1275봉 아래 독야청청 '절개의 지존'.,범봉.

1967.5.30 전까지는 연화대(蓮花臺)라고 불리웠던 암릉.

 

그전까지는 전인미답 처녀지였던.,연화대(蓮花臺).

약초꾼들 사이에 호랑이가 사는 곳으로 추정되던 곳.

그래서, 감히 그 누구도 오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곳.

 

범봉 주변 바위길은 요델산악회에 의해 초등되었다.

개척이 활발해지면서 사연도 함께 쌓여갔던.,천상의 길. 

1967.5.30 개척 당시 그곳 범봉은 놀랍게도 솜다리꽃 군락지.


67년 5월30일 천화대 범봉 개척 초등. 

 

범봉 정상 벽에 붙어 자생한 석이버섯은., 흑범 형태.

솜다리꽃 군락지 위에 흑범 한마리가 웅크려 앉은듯..

'솜다리꽃 군락지' 범봉은 '天上의 花園' 같아.,,天花臺.          


67년 5월30일 천화대 범봉 개척 초등. 


알프스 산소녀가 꽃으로 환생했다는 .,에델바이스.

산악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에델바이스(솜다리꽃).

그후 연화대 지명은 잊혀지고 천화대로 불리운.,범봉 일대.

 

개척 당시 솜다리꽃 군락지.,'천상의 화원' 천화대.


설악산의 꽃 (2011년 9월) 

 

꽃잎이 솜처럼 하얀 털로 덮혀 있다고 하여.,솜다리꽃

솜다리꽃의 꽃말은 "잊을 수 없는 추억", "고귀한 사랑".

하늘나라 선녀처럼 순결한 처녀를 상징하는., 솜다리꽃.  


그곳 범봉과 왕관봉 사이에 위치한.,희야봉.

 

천화대에서 흰구름 손에 잡힐듯 아스라한.,희야봉.

희야봉 정상에서 40m, 20m를 하강하면.,석주길 동판.

붉은 바위벽에 부착된.,사각동판이 눈길을 끄는.,희야봉.

 

개척 前., "칼날 암릉"이라 불리웠던.,곳.

천화대 능선과 석주길이 만나는 곳.,희야봉

석주길 휘날레 자일 하강 루트 포인트.,희야봉.


서툰 오름짓은 아예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는.,희야봉.

오름짓 유혹하는 자태와 달리 앙칼지게 밀어내는.,바위벽.

고혹적인 처녀의 도도한 콧대 만큼 하늘을 찌르는.,칼날능선.


설악산 희야봉 일대 

 

마치, 하늘나라 선녀가 지상으로 쫓겨 내려와서

억겹 세월  승천을 기다리며, 알몸으로 벌받는 산세.

그 누구의 접근조차도 결코 허락하지 않을듯한.,희야봉.


'어둠을 밝힌다.'는 불교 색체 지명일까?

'환희에 찬 초야(初夜)'를 의미하는 이름일까? 

개척자가 처녀지를 개척한 기쁨을 뜻하는 이름일까?


서락 희야봉(Backpacking) # 1 

 

석주길 개척자가

'신혼의 첫날밤'을 

보내고 싶었다던 곳.

 

'외설악의 속살' 천화대에서도 어둠 속에 빛나는 희야봉.

희야봉에서 보이는.,장군봉, 권금성 넘어., 울산바위, 달마봉

1960년대 산악인 송준호가 까만돌과 신혼여행을 약속한 석주길.


설악산 희야봉 일대 

 

'희야봉은 송준호가 명명한 지명이 아닐까?'

아가씨 姬, 밤 夜, 봉우리 峰.,희야봉(姬夜峰).

송준호가 생애 최후의 순간까지 품었던.,까만돌.


자일파트너였던 엄홍석과 신현주를 못잊던, 송준호.

먼저 고인이 된 석주를 그리워하며 개척했던.,석주길.

석주길 완공 때 취재 차 동행한.,'송준호의 연인' 까만돌.

 

'두 사람은 이곳에서 사랑이 싹튼걸까?'


설악 잦은바위골_희야봉 

                                                                      희야봉 & 설악골.

설악산 잦은바위골-희야봉-설악골 

 

그무렵 월간 '산' 기자였던., 까만돌 김백이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자 미모의 여성.

까무잡잡한 미모가 인상적인 연인.,애칭 '까만돌'.

 

까만돌 김백이와 장래를 약속한 후, 토왕폭에서 숨진.,송준호.

'신혼의 첫날밤' 꿈도 물거품이 된 비운의 연인.,송준호와 까만돌.

그녀가 털실로 짜준 장갑, 그녀가 털실로 짜준 목도리가.,송준호 유품.

 

송준호 시신 주머니에서 나온.,까만 조약돌.

두 연인 간 사랑의 정표로 간직했던.,까만돌.

그것이 두 연인 간 마지막 사랑의 정표인 유품.


설악산 천화대 

 

두 연인이 신혼의 첫날밤을 꿈꾸던 곳이

석주길 희야봉 안부.,야영터로 전해온다.


설악산 천화대~범봉 등반 산행(3)/왕관봉이 왜 이다지도 멀기만 한겨?? 

 

석주길 동판이 부착된 인근.,3~4평 남짓 야영터.

송준호가 석주길을 개척할 당시는 솜다리꽃 군락지. 

솜다리꽃은 '처녀의 순결'을 상징하는 풀꽃이기도 하다.

 

온몸에 하얀 솜털이 뽀송뽀송 뒤덮힌.,솜다리꽃.

첫날밤 새색시 수줍은 몸에 치솟는 솜털처럼 고혹적. 

감히, 손댈 수 없어 바라만 보아도 숨막힐듯한 아름다움. 


천화대 석주길을 느릿느릿 한걸음씩 즐기다보면

희야봉 안부에 도달할 무렵 즈음 해가 기울어간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면, 석양빛이 아름답다.

 

"아!~~"

"음..'

 

노을에 물든 희야봉은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의 수줍음.

보름달 아래에서는 날개옷을 잃어버린.,선녀의 자태와 같다.

은하수 밤하늘로 날개옷을 펄럭이며 승천하고픈 선녀의 자태. 

 

희야봉 자태는 천화대 1004가지 꽃 중의 꽃.


희야봉 정상에서 가까이 마주 보이는.,범봉.

천화대에서 왕관봉과 범봉 사이에 위치한.,희야봉.

천화대에서 표범골 하강 루트.,왕관 바위가 있는.,왕관봉.

 

일명 '표범골' 이라 불리우는.,잦은바위골.

 

1990년대 천화대 리지 등반 코스

비선대 - 왕관봉 - 잦은바위골 하강.

등반장비, 의류, 식량 등이 무거웠던 시절.

 

해질 무렵에 잦은바위골 하강은., 위험.

 

어두워지면 하강 포인트를 찾기가 어렵고

발을 잘못 딛어 낙석 발생율 위험성도 높다.

하강한 후에도 칠흙 같은 어둠 속.,잦은바위골.

 

1960년대 개척 전까지

호랑이가 사는 곳으로서

약초꾼들 사이에 소문난 곳.

 

"잦은바위골에서

호랑이를 보았다."

 

천화대를 개척할 1967년 당시에는

잦은바위골이.,천화대 루트의 들머리.

그 이후로는 천화대 날머리.,잦은바위골.


1970/80년대 '왕관봉~범봉' 구간은., 범봉 리지.

극소수 산악인 만 오를 수 있었던.,전문 등반 루트.

그당시 천화대 등반 정점이자 반환점은 왕관봉이었다.

 

하여, 1990년대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천화대 희야봉 석주길 동판. 


설악산(8/16) 잦은바위골-천화대구간(석주동판-희야봉-왕관봉)-염라길-까치골-설악동 


"진실이 달빛에 묻히면, 전설이 되고

그 전설이 햇볕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

 

산행을 하다보면 - 천화대 '석주길 동판' 비화.

 

2006년 '다음' 인터넷 글이 퍼져, 대중화 된.,석주길.

그후, 희야봉 안부에 부착된 '석주길 동판'은 천화대 명소.

69년10월 7일 개척 후 36년간 잊혀져가는 전설이었던.,석주길.

 

2006년 이후 햇볕을 받아 널리 알려진.,천화대 석주길.

 

2000년대 이후에는 비선대에서부터 범봉까지 암릉이.,천화대

잦은바위골을 사이에 두고 칠형제봉과 마주보이는 암릉.,천화대.

바위길따라 발 아래.,천가지 꽃이 피고지는 '야생화 천국'.,천화대.


바람꽃이 지천에 널려있는.,설악산 천화대.

 

바람 결에 피었다가 사라지는.,꿩의 바람꽃

꽃대 하나 뿐이라, 외롭고 처연한.,홀애비바람꽃

꽃말이 '사랑의 괴로움', '사랑의 비밀'.,너도 바람꽃.

 

"너도 바람꽃이냐?"

" 나도 바람꽃이다."

 

바람꽃류 만 120 여 가지.


"꽃이 피는 이유는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화낭년 속고쟁이 가랑이꽃' 은방울꽃., 꽃말은 순결.

개불알풀 가랑이 틈새로 보이는 쌍방울 꽃말.,기쁜 소식.

 

이름 모를 풀꽃들의 향연장.,'천상의 화원'


천 여 가지 풀꽃들이 천사 같은 자태를 뽐내는듯.

성도 이름도 모를 풀꽃.,하나 하나마다.,미의 여신인듯.

억만년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듯한.,천상의 화원.

 

'1004'가지 풀꽃들이 피고지는 '천상의 화원' 천화대

 

옛부터 1000 여 암봉이 千佛인듯 모여 서있는듯 하여.,천불동.

천불동 길목.,비선대는 속세의  모진 인연도 끊을 수 있다는 곳.

설악산에 입산해 비선대를 지나면 속인도 신선이 된다는.,천불동.

 

천불동계곡(千佛洞溪谷)은 공룡처럼 생긴 공룡능선

'하늘에 핀 꽃' 천화대 & 화채봉' 3줄기 능선이 품었다.

그곳에 치솟은 수많은 암봉들이 마치 천불상이 서 있는듯.

 

이 계곡을 따라 염주폭포를 비롯해 천당폭포(天堂瀑布)·

오련폭포(五連瀑布) 등과 문수보살이 목욕했다는 문수담

귀면암, 와선대(臥仙臺), 비선대(飛仙臺), 금강굴(金剛窟) 등.


천불동에서 千佛을 거느린듯,

가장 깊고도 높은 암봉.,연화대.

'불꽃잠자리' 연화대 모양새.,범봉.


천화대 범봉 

범봉.

설악산 설악골 산행(설악골~범봉~공룡(1275봉)~마등령) 2 


 연화대(蓮花臺)란.,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때 앉은 풀방석.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곳이 곧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

하여, 성불한 고승의 다비식 화장하기 전.,'불꽃 잠자리' 연화대.


"불꽃이 연꽃처럼 타올라

불성(佛性)이 피어나기를.,

기대한다."고 하여.,'연화대'.

 

"내가 사랑하는 그대는 항상 사랑이니 나의 사랑이 필요없구나.

하지만, 그대도 뭔가 부족한듯, 아쉬운듯, 나의 사랑이 필요한듯.,

때로는 좀 인간적이기를 바란다. 그대! 연화대 위에 앉은 붓다여 ~~"


연화대는 '범봉 능선에서 천불동으로 이어지는.,암릉 전체 지명.

울산바위 달마봉 권금성 화채능선 외설악 동해 바다까지의 전망대.

"천불동에서 바라다보이는 전망이 '천상의 화원' 같다." 하여.,천화대

 

옛부터 성불을 꿈꾸는 불자들에게 '상상 속 성역'.,연화대

개척 당시 천화대(범봉) 지명은<연화대>에서 유래된듯 싶다.

천화대는 개척 때 범봉을 일컬었지만, 차츰 그 영역이 넓어졌다.


천화대릿지 개념 


2016.9.16 뉴스 - 천화대 등반 40대 남성이 추락해 중상.
15일 오전 9시55분께 강원 속초시 설악동 천화대 암벽에서

등반을 하던 A(46)씨가 15m 아래로 추락해 머리 등에 큰 부상.

A씨는 긴급출동 소방항공대 헬기로 인근 병원 후송 후 치료.

경찰과 소방당국은 A씨 일행 상대로 정확한 사고경위 조사 중.


...............천화대.,접근 & 비상 탈출 사례................

천화대릿지 :  비선대 출발~ 왕관봉(당일 계획)일 경우.
인원 및 장비 : 4명, 60m 자일 한동, 20m 보조자일 한동.
설악동주차장 05시 :분 - 비선대- 500m 1피치 출발점(07:00)


천화대릿지 진행(암벽,워킹,대기시간,휴식 및 간식 시간포함)

왕관봉 하강(18:00)- 왕관봉 하산후 염라골- 설악골- 야간 하산.

'염라골 ~설악골' 하산때 헤메었고 초행길이라 약 17시간 쯤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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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골 등반기점에서 왕관봉까지 3인조 경우 4시간 정도 소요.

소공원에서 등반기점 접근시간과 하산시간까지 합치면 꼬박 하루.

왕관봉에 정오경 도착하면 희야봉까지 등반 후 설악골 하산도 무방.


왕관봉에서 희야봉까지 등반한 다음

범봉 안부로 하강하기까지 2시간 소요.


등반허가는 5월 1일~6월 15일 사이.,사전 등록.

한해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등반신청이 가능.


설악산국립공원 홈페이지(www.knps.or.kr) 메인화면.

오른쪽 ‘알림판’의 ‘2016 암장허가 신청’을 클릭한 다음

양식을 다운받아 루트, 장비, 명단 등 기재.,이메일 신청.


설악산국립공원 암장관리사무실

이메일 seoraksan1708@hanmail.net

팩스 033-635-1276, 1일 등반인원은 30명.  
'소공원~설악산'경우., 문화재관람료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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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대(天花臺)는 하늘에 꽃이 핀듯한., 기암절벽 연봉.

구름바다에 다도해처럼 떠있는 암봉마다.,天上의 花園인듯.. 
설악을 찾는 많은 산악인에게 인기 높은  리지등반 코스.,천화대.


천화대

                                                                        설악산.,천화대.

외설악 천화대 1(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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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길 동판 & 개척 비화(秘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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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대(天花臺)는 20 여 연봉 암릉마다.,'天上의 花園' 

구름바다 위에 다도해처럼 떠있는 연봉마다..'하늘나라 꽃.'
설악을 찾는 많은 산악인에게 인기 높은  리지등반 코스.,천화대.

 

천화대는 발걸음마다.,야생화 천국

 

주말마다 새로 피고 지는.,이름 모를 풀꽃들.

풀꽃마다 애틋한 전설과 꽃말을 간직하고 있다.

천화대를 찾는 이들에게 24 절기마다 색다른 즐거움.

             

왕관봉 아래에 피어있는.,바위구절초

희야봉 상단 하강길 침니에 핀.,금강초롱

범봉 안부 주변에 솜다리, 금강초롱, 산오이풀.


온갖, 이름 모를 풀꽃들의 향연장.,천화대.

각자 나름대로 자태를 서로 뽐내는.,'꽃의 여왕'.

'1004'가지 풀꽃이 피고지는.,'천상의 화원' 천화대.

 

아득한 태고에서부터

시간의 흐름 마저도  멈춘., 

'天上의 花園' 천화대(天花臺)   


설악산의 가을 

                                                                 설악산 & 대청봉 일출.

아름다운 설악산 설경 


태백산맥에 속하는 설악산의 주봉은 대청봉(1,708m).

남한에서 한라산(1,950m)·지리산(1,915m)에 이어 3번째.

한가위에 눈이 덮이기 시작, 하지에 녹는다 하여., 설악(雪嶽).   


연평균 기온은 남한에서 가장 낮으며,

산정과 산록의 온도차는 약 12~13℃.

동해에 가까이 있어 강수량은 많은 편.


설악산 산양의 혹독한 겨울나기 

                                                                              설악산 산양.


사향노루· 반달곰 ·까막딱따구리 등 495종 야생동물 서식지.

백담천(百潭川)에 냉수성 희귀어족인 열목어와 버들치가 산다.

천화대는 산양 보호구역으로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출입을 제한.


저항령계곡 

                                                                             저항령 계곡

저항령 계곡 일대는.,야생동물 서식처이자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면서.,산양 보호구역.

1950년 6.25 전란 격전지였던.,저항령(低項嶺).


죽을 똥싼 저항령계곡 3박4일 

                                                                    6.25 격전지.,저항령.



백담사 ~수렴동 ~만경대 ~마등령 ~저항령 ~ 황철봉.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 해서 못살겠네..",6.25 격전지.

설악산 산양 서식지 저항령 계곡은 국립공원 특별 보호구역.

 

DMZ 지뢰밭을 탈출해 자유를 찾아온.,야생동물들의 천국.


비선대에서 범봉까지 이어지는 암릉.,천화대.

천화대 가지능선 암릉 .,석주길 흑범길 염라길.

하산길은 주로 잦은바위골 또는 설악좌골로 한다.


[설악산 잦은 바위골 (50m 폭포, 100m 폭포) 10/18(일)] 2

      

잦은바위골 허리에 있는

50m 폭포 & 100m폭포,


[설악산 잦은 바위골 (50m 폭포, 100m 폭포) 10/18(일)] 4 

                                        잦은바위골.,100m폭포 & 여근곡.

설악산(설악골~범봉하단~100m하강~잦은바위골) 160821 


한낮에도 어두울 만큼 깊고., 깊은., 잦은바위골 협곡.

살아 들어갔어도 죽어서 나올 수 밖에 없는.,여인곡 산세

눈사태, 산사태, 낙석, 소나기 직후 소용돌이 급류.,다발지역.

 

'낙석이 잦아 "잦은바위골"이라고 불리울까?'


필자가 잦은바위골에 첫발을 들인.,1993년 여름.

비선대~천화대 왕관봉 ~잦은바위골 하강~비선대.

후배 클라이머들과 함께 '저항령 야영장' 등반 캠프.


약 1주일 가량 지내며.,

적벽, 칠형제봉, 장군봉.

울산바위 천화대 등.,등반.


1960년대까지 그 누구도 들어가본 적 없던.,처녀지.

범이 산다고 소문나 심마니도 발길 들인 적 없던 곳.

국내 산악인들에게는 개척 대상지에서 경외되었던 곳.


그 누구도 공경하며 두려워하던.,'신의 영역'.

그 입구에 접근조차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곳.

그곳 안으로 진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


설악 잦은 바위골 


'천상천하 유아독존' 개척정신의 지존.,요델 추장.,백인섭

1968년 1월에 요델 정예부대를 이끌고 100m 빙폭 초등 도전

(백인섭 임청규 송준호 엄홍석 나경봉 전철민 이형삼 서성우)


당시, 범도 때려잡을 만큼, 용감무쌍한.,최정예 전사들.

하여, 당시 개척된 설악산 루트 지명들이.,범봉 흑범길 등.


1968년 동계설악산 잦은바위골 개척등반기. 

 

100m 빙폭 허리에서 암벽으로 우회해.,빙폭 정상 공격에 성공.

백인섭은 초등 후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해.,100m 빙폭 재도전

요델 회장 겸 등반대장 백인섭 & '최정예 전사'., 송준호, 오세진.


..................잦은바위골 100m빙폭.........................

1971년 1월 송준호와 오세진이 11시간 사투 끝에 초등.

1972년 12월 중순 송준호는 30분 만에 100m 빙폭 등반 성공.

1971년 사용했던 8발 아이젠을., 1972년 12발 아이젠으로 교체.

 

100m 빙폭 등반으로 자신감을 갖게 된 송준호.

이젠 토왕폭도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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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동계설악산 잦은바위골 개척등반기. 

 

요델산악회는 1960년대~1970년대까지

도봉산 선인봉과 설악산에서 주로 활동.

도봉산에도 개척한 바위길이 많이 남아있다.

 

표범길, 요델 버트레스 허리길 낭만길 外 多數.

 

천화대 일대 現在 지명과 바위길 이름들.

요델 산악회에서 개척등반 후 명명한 흔적.

범자가 들어간 곳은.,거의 요델산악회 활동무대.

 

백인섭 회장을 주축으로 하는 요델산악회 1기 팀에

나경봉 권유로 송준호 엄홍석이 요델산악회에 합류하자

송준호를 따르는 후배 오세진까지 요델산악회 2기 팀에 합류.

 

요델산악회는 범떼 같은 2기 팀의 맹활약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비약적으로 도약 한다.

천화대 루트 중 희야봉 안부에 부착된.,석주길 동판. 


설악산 희야봉(121002) 

                                                     설악산의 칼날 암릉.,희야봉.

 

누가.,이 험란한 칼날 암릉에

무슨 말못할 사연이 숨어 있었기에

루트 개척 추모 동판을 붙여 놓았을까?


석주길 동판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선은 설악의 주능이다.

공룡능선에서 흘러내리는 설악골과 잦은바위 사이.,천화대.

석주길은 왕관봉과 범봉사이를 올라붙는 성곽 같은.,칼날 암릉.


그곳에 송준호는 처음으로 올랐고

그 능선에 '석주길'이라 이름을 붙였다.

엄홍석과 신현주 이름 끝자를 따 '석주길'


그는 석주길이라 새겨넣은 동판을 제작.

그 암릉과 천화대가 만나는 곳에 붙였고,

석주 영전에 바쳤기에 석주길이 태어난 것.


에델바이스 


1969년이면, 국내에서는 암벽등반 장비도 구할 수 없어

산악인이 직접 철공소에서 제작해 만들어 쓰던 시절이라

희야봉 칼날 암릉을 개척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설악산 석주길 오르던날 풍경(7/8일) 


..................천화대 석주길 동판.,위치........................ 
공룡능선에서 흘러내린 설악골과 잦은 바위골 사이 천화대.
천화대는 여러 갈래의 작은 가지능선 암릉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 설악골에서 왕관봉과 범봉 사이에 붉은 성곽처럼 생긴 암릉.

 

희야봉 아래  협소한 안부에 부착된., 석주길  동판.

.....................................................................


석주길8.1. 

 
비선대 철다리에서 설악골로 30분쯤 오르면., 흑범길
그곳에서 20분쯤 더 오르면 왼쪽 큰 바위에 석주길 글씨
이 바위에서 왼쪽 능선을 10분쯤 오르면 나타나는 바위지대
 
계속 능선을 타고 걸어가면 쉬운 암릉이 연이어 나타나고

 본격적인 암릉은 거대한 붉은 벽(성곽) 왼편에서 시작된다.

일단 들어서면, 중도에 갈증 해소할 샘물 조차 없는 험한 암릉.


송준호가  두 악우 '석주의 넋'을 추모하면서

그 붉은 바위벽에 직접 부착했다는., 석주길 동판.

송준호가 생전에 신혼 첫날밤을 꿈꾸었던.,희야봉 안부.


석주길8.1. 

 

석주길 동판이 부착된 희야봉 안부.,3~4평 남짓한 야영터.

희야봉 정상 바위 틈새에 처녀의 순결을 상징하는 솜다리꽃

희야봉 달빛 아래 하얗게 핀 솜다리꽃을 바라보는 신혼 첫날밤.  

 

송준호는 까만돌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걸까?

 

신혼의 첫날 밤을 꿈꾸며 달빛 아래 밤을 지새웠을 두 연인

송준호와 까만돌이 머문 곳으로 추정되는 희야봉 안부 야영터.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 또한 두 연인의 사랑을 축복해 주었을듯..

 

석 & 주 사후 2달 만에 개척된.,석주길.


석주길 하강 

 

그무렵 까만돌과 열애 중이었던.,송준호.
송준호가 석주길을 개척하기 이전까지는
인적조차 없었던 험하고 외딴.,칼날 암릉.

 

까만돌 김백이는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월간 산 기자.

전설적인 산악인 송준호를 취재 중 차츰 연인사이로 발전.

송준호가 석주길을 개척할 무렵 몇차례 동행 취재한.,까만돌.

 

송준호가 석주 사후에 만났던.,연인 까만돌.


16.07,02(일), 석주길~왕관봉 

16.07,02(일), 석주길~왕관봉 

16.07,02(일), 석주길~왕관봉 

16.07,02(일), 석주길~왕관봉 

16.07,02(일),석주길~왕관봉 

1947년 9월 20일 생 송준호는 60년대말 ~70년대 초., 활동.
1973년 1월 2일, 토왕성 빙폭에서 첫등정을 시도 중., 추락사.
만 25살에 숨진 그는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전설적인 산악인.

 

1004가지 풀꽃이 피는 '천상의 화원'.,천화대.

희야봉 석주길 동판 비화는 천화대 꽃 중의 꽃 같다.

석주길을 개척한 송준호는 그당시 산악계의 떠오르는 별.

 

그당시

송준호가 
이 외딴 곳에

석주길을 개척한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이미 고인이 된 당사자는 말이 없고

그당시 산악인 악우들의 말 만 듣고서는

그 사실을 확인 할 수가 없기에 안타깝지만..

석주길에는 전설 같은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송준호는

연인 까만돌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오직 석주만 그리워했던듯..

 

그는 그후에도

고인이 되는 날까지

故 석주를 잊지 못했던듯..

 

그러나,

송준호는

그러한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

 

송준호 사후에

그가 남긴 유품에서

전설 같은 사실을 짐작할뿐.

 

 그래서,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40년이 지났어도

전설 같은.,사랑 이야기.

.
1960년대 말, 요델 산악회에서 송준호 엄홍석 신현주
세 사람은 동갑나기 자일 파트너 친구이자 연인같은 사이.
어느 한 가지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서 늘 함께 다녔다.

 

결국 송 준호는 세 사람의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물러서기로 결심하고 두 사람 곁을 홀연히 떠났고
그로부터 얼마 후 연인이 된 두 사람에게는 비운이 찾아온다.


토왕성폭포 (설악산) 


화채능선 칠성봉(1077m) 북쪽 계곡.,토왕성폭포

비룡폭포, 육담폭포를 지나 쌍천(雙川)에 합류되는

토왕골은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울 만큼 위험한 구간.

 

토왕골에서 용이 승천하듯 용솟음 치는.,비룡폭포.

 

당시, 요델산악회 회원 20 여명은 비룡폭포에서 휴식 중

백인섭 회장을 주축으로 하는 1기 팀은 울산암으로 갔었고

요델 2기 팀은 그곳에 남아 인근에서 각자 자유시간을 즐겼다.

 

여자 회원 신현주가 실족 후 미끄러져 소에 빠져들자

엄홍석이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둘 다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은 육담폭포 급류에 휩쓸려.,함께 죽음으로 여행.


10월 17일 설악산 비룡 & 육담폭포 트레킹 

 

비룡폭포에서

육담폭포까지는

약 500m.,급류 물길.


석주는 한여름 토왕골에서 

급류로 불어난 토왕폭을 보며 

한겨울 토왕빙폭 초등을 꿈꾼걸까?


설악 토왕폭/천화대 PHOTO 

                                                                                 토왕 빙폭.

 

그당시, 석주는 토왕골에서 내려오다가

비룡폭포와 육담폭포 사이에서 실족한듯.

어느 지점에서 실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외설악 설악동에서 비룡교 지나 비룡폭포 통해 오르면

6개 폭포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육담폭포에 이를 수 있다.

이 폭포 주위 산세가 웅장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비룡폭포는 외설악을 배수해 동해로 흘러드는 쌍천(雙川)의

지류가 화채봉(華彩峰)의 북쪽 기슭에 만들어놓은 폭포이다.

비룡폭포가 흐르는 하천의 상류 쪽에 토왕성폭포(土旺城瀑布).


그 하류 쪽에 육담폭포(六潭瀑布)를 동반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폭포 속에 사는 용에게 처녀를 바쳐

하늘로 올려 보내 심한 가뭄을 면하였다고 해서., 비룡.


설악산 비룡폭포 

                                                                       설악산 비룡폭포


설악산 비룡폭포는

금강산 비룡폭포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금강산비룡폭포 

금강산 비룡폭포 &설악산 비룡폭포

비룡폭포 [飛龍瀑布] (설악동) 

                                                                       설악산.,비룡폭포

  


지금은 철계단, 등 안전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지만

1969년 설악산에는 등반 중 숙박할 산장조차 없던 시절.

1人당 30kg 배낭을 메고 20일간 하계 등반 중 발생한 사고.

 

철수 하루 전 휴식일인 8월 7일에 일어났던.,사고

 


설악산 비룡폭포 

                                                       설악산.,비룡폭포 & 육담폭포

설악산 비룡폭포 


요델산악회 백인섭 회장은 설악산 약초꾼까지 동원해

겨우 시신인양 3일장을 치루다 탈진해 비행기로 서울 후송.

그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던.,고인 '엄홍석과 신현주'.

 

설악산에서 숨진 산악인들의 공동묘지.,'노루목'.

 

설악동 입구에 있는 노루목처럼 생긴 야트막한 고개 부근.

그곳에 있는 '십동지 묘'는., 국내 최초의 산악인 공동묘지

'산악인 사자(死者)의 마을' 노루목에 나란히 묻힌 두 사람.

.


설악산 천당폭포 2012년9월22일 단석산우회 

                                                                         설악산 천당폭포


 '설악산의 전설'로 추억된 석주길의 실존 인물.

석주길이 있어 풍문 속에서 기억되었던.,두 사람.

석주길을 찾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항간의 풍문.

 

...........석주의 죽음에 관한.,항간의 풍문..........

설악산 천당폭포 빙벽을 선등하던 신현주가 실족하자

후등하며 확보를 보던, 엄홍석이 그녀의 위기를 직감했고

순간 자신의 몸을 빙벽 아래로 날려 추락거리를 줄이려 시도.

.

목숨을 걸 만큼 자일 파트너쉽이 없다면 불가능한 확보법.
그 추락하중을 못견뎌 빙벽에 설치한 확보물이 터져나갔다.
두 연인은 한 자일에 묶인 채 추락하며., 죽음의 세계로 여행.
.
그당시 확보물은 발달되지 않았기에 거의 유사한 사고.
워낙 외딴 곳이라 그 사고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자일에 남겨진 충격 흔적으로 사고상황을 추정할 뿐.'

...............................................................................


약 40여년간 산악인 간에 구전에서 구전으로

실화보다 더 유명하게 알려졌던.,항간의 풍문.

항간의 풍문이 있어 더욱 널리 알려진.,석주길.



설악산 ...천당폭포 

 


양폭산장 위 천당폭포는 천당리지 수문장 격 관문.

1969년 그해 겨울, 단둘이 빙벽에 열정을 쏟았던.,석주.

그당시 산악인들 간에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온.,풍문.

 

약 40년간 항간을 떠돌던.,'설악산의 전설' 같은 풍문.

그 풍문이 애틋해 천화대 석주길은 찾는 산악인도 많았다.

그 풍문이 없었다면 석주길  비화의 맥이 끊겼을지도 모른다.

 

항간의 풍문은 사실일까? 누가 지어낸 이야기 일까?

석주는 비룡폭포에서 숨진걸까? 천당폭에서 숨진걸까?

두 사람은 항간의 풍문처럼 죽음을 초월한 연인 사이였을까? 



...............1969년 8월 7일 산악사고.,2줄 신문 기사.............

소나기 직후 육담폭포 불어난 급류를 손잡고 건너던., 남녀 실족.

동국대 경영학과 3학년 엄홍석(23세), 회사원 신현주(23세).,익사. 

........................................................................................


두 사람은 비룡폭포 아래 위치한.,육담폭포.

그곳 급류에 휘말려.,'영혼의 동반자'가 된 것.

당시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는지 알려진 바 없다.


&quot;설악산 &apos;토왕성폭포&apos; 산행&quot; 

 


엄홍석은 피에몽 산악회 고교시절부터 자신의 절친한 벗.

신현주는 H대학교 교무과에 근무하는.,요델산악회 여회원.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이 잠적한 그 사이에.,일어난.,산악 사고.


(당시, 송준호가 군에 입대했기에)

('잠적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광성고교 시절 아이스하키 꿈나무였던.,엄홍석.

빙판 위에서는 비호처럼 몸이 날렵한 선수였지만

그의 수영 실력으로는 급류를 헤쳐나오기에 역부족.

 

차라리, 셋이 함께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사고.

셋이 함께 있었다면, 막을 수 있는 사고.

..

'내가 석주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석주 곁을 떠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석아! 주야! 지켜주지 못해서.,미안해.'

 

목숨 맡길 만한 두 자일파트너를 잃어버린 슬픔.

그로 인해 '석주길' 개척 비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설악을 찾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석주길 동판 비화.

 

훗날, 故 송준호 유품에서 발견된.,친필 메모.

토왕폭 사진 뒷면에 송준호 필체가 담긴.,유품

송준호가 석주 묘에서 쓴 자신의 심정을 담은 메모.



석아!

 

이제 하나 남은 토왕성

나의 명예 걸어 자네 이름으로

빛내겠네

 

자네는 노루목

나는 토왕성

대화를 나누세.

 

                 호.



송준호는 석주길을 개척한 후

엄홍석과 신현주 영전에 바쳤고

이어, 노루목 엄홍석의 묘 앞에 서서

토왕폭 초등을 다짐하는 의지를 밝힌다.


"설악산 '토왕성폭포' 산행" 

 

엄홍석 묘에서 바라다 보이는., 토왕폭 상단.

토왕폭 가는 길목에 있는 육담폭포와 비룡폭포

토왕폭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노루목 석주의 묘.

 

'토왕폭 초등' 명예를

엄홍석 영전에 바치겠다는

송준호의 굳은 의지가 담긴 메모.

 

1968년 1월 20일~2월 5일 설악산 동계 표범골 개척등반

그당시 요델산악회 개척등반 팀에서 피켈 소유자는 두 사람 뿐.

금강 모래내 피켈을 사용한 백인섭과 일제 피켈을 갖고 간.,엄홍석.

 

엄홍석은 광성고교 아이스하키부 운동선수 출신 산악인.

도봉산에서 하체단련 중 산이 좋아 피에몽 산악회에 가입.

그후, 나경봉, 송준호와 함께 요델산악회 2기로 가입해 활동.

 

나경봉과 송준호는 고교1학년 같은 반에서 만나

피에몽 산악회에 가입해 일찌기 등반을 시작했지만

엄홍석은 나경봉과 송준호 두 벗보다 늦게 등반에 입문.

 

중학교 시절부터 등반을 시작했던.,나경봉.

고교 1학년 시절부터 등반을 시작했던.,송준호.

나경봉, 송준호 보다 뒤늦게 등반에 입문한.,엄홍석.

 

세 악우는 요델산악회 내에서 동갑내기 삼총사.

 

그당시 등반 팀의 진로를 가로막았던 표범골 100m 빙폭.

그곳에서 일제 피켈을 기꺼이 선듯 두 벗에게 내밀던.,엄홍석.

그 피켈을 빌려 잡으면서부터 빙벽 등반에 입문하게 된.,송준호.

 

그후 빙벽등반에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엄홍석과 송준호

두 악우는 자일파트너로 함께 토왕폭 초등 명예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과 열정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스러진.,고 엄홍석.

 

1969년 8월 7일 사후 노루목에 묻혀 영원히 잠든.,엄홍석.

엄홍석이 유물로 남겨 '절친한 벗' 송준호에게 전해진.,그 피켈.

'토왕폭 초등 정상에 케룬을 쌓고 그 피켈을 꽂으리라.' 다짐한 송준호.

 

 

'아~'

그러나,

송준호는

애석하게도

1973년 1월 2일.

토왕폭 첫 희생자.


설악산 토왕성 폭포 등산 후기(2015. 12. 20) 

.

 

이미 삶과 죽음의 벽을 넘어서 이어졌던 우정.

고교시절부터 자일파트너이자 절친한 벗.,엄홍석.

송준호가 엄홍석과 늘 함께 꿈꾸었던.,토왕폭 초등 명예.

 

고 엄홍석은 송준호보다 뒤늦게 등반에 입문했지만

등반에 입문 후 등반력이 하루가 다르게 도약했던.,벗.

특히, 빙벽등반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벗.

 

석주가 나란히 묻힌.,노루목 산악인 묘지.

석주가 함께 운명한.,토왕골 육담폭포 급류.

생전 엄홍석과 송준호의 꿈이었던.,토왕폭 초등.

 

그당시 1960년대 말은 해외 원정 등반이 극히 제한된.,시절.

알피니즘 욕구불만., 해소 훈련장으로서 각광 받았던.,설악산.

토왕 빙폭 초등 경쟁은 오늘날 히말라야 14좌 등정경쟁 만큼 치열.

.

산악회마다 산악회 사활을 걸고 토왕 빙폭 초등을 시도.

토왕 빙폭 초등 산악회는 히말라야 원정대 선발 경쟁에서 유리.

산악회마다 탁월한 등반력을 갖춘 산악인을 가입시키려 경쟁이 치열.

 

요델 산악회 2기로 가입한., 송준호, 엄홍석 나경봉. 오세진.

 

백인섭 회장이 주도한 요델을 명문 산악회로 도약 시켰던 주역들.

그들이 있었기에 요델은 떠오르는 명문 산악회로 비약적인 발돋움.

그중, 송준호, 엄홍석 나경봉. 3명은  광성고교 50회 동기동창 악우들. 

 

피에몽 산악회에서

요델 산악회까지.,

함께 활동했던 3인.


    

                                

..............광성고교 산악부 '피에몽 산악회'.............

60년대 광성고교 아이스 하키부는 전국 대학부까지 제패.

연고전이 치열했던 시기라 연대, 고대에서.,스카웃 경쟁전.

경희대를 포함한 명문 대학 들간에도 치열한 스카웃 각축전

 

광성 아이스하키 선수들을 특차해 4년 장학금까지 제공.

본인이 원하는 대학 학과에 특차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특전

광성고교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면 곧 명문대학 특차장학생 1순위.

  

명문 대학 특차 장학생.,청운의 뜻을 품고

부모님 권유에 따라서.,또는 자의 반 타의 반

광성 고로 몰려든.,연고대 특차 장학생 꿈나무들.

 

당시, 女心을 뒤흔들던.,국내 원조 '돌아이 그룹'.

 

광성 아이스하키 부 선수들이 가는 곳마다.,사인 공세.

시합 때마다 국내 매스컴 각광을 받았던.,광성 아이스하키.

당시, 타 아이스하키 명문고교들에 비해 손바닥 만한 운동장.

'

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전국의 대학부까지

광성고교가 제패할 수 있었을까?'

 

그무렵 광성 아이스하키부 

하체 체력단련장은.,도봉산.

 

그당시 광성 아이스하키부와 산악부는 함께 체력 단련.

국내 아이스하키 명문 고교들도 경쟁하듯 도봉산 체력훈련.

그후, 국내 아이스하키 선수와 산악인 꿈나무들의 요람.,도봉산.

 

 

광성고교 산악부가 배출한., 산악인.

O2 월드 빙벽센터 건립자.,배창순(49회).

기네스북에 등재된.,세계 최고 실내 빙장.

 

국제적 명칭은 "Ice Palace(얼음 궁전)'


'송준호, 엄홍석, 김서운 나경봉 등(50회).'

봉정암거사 김재중, 늑대 홍경의 산악인 등.

광성 산악부 OB 산악인 모임.,피에몽 산악회



범떼 처럼 날쌔고 용맹한.,도봉산 천하무적 집단.

대부분, 명문 가문 출신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

그들 중 산이 좋아 산악인의 길을 선택한.,50회, 삼총사.

 

송준호가 마지막 숨을 거둘때까지 잊지못했던.,엄홍석.

탁월한 등반력과 겸손한 인품, 배려심이 깊었던.,송준호

두 악우를 요델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던.,나경봉.

       .

그 외에도 '봉정암 거사' 故 김재중 산악인.

 

.....................<봉정암거사>., 故 김재중 산악인..................

설악의 전설 '봉정암 거사' 김재중 역시 피에몽 산악회에서 배출.

요델산악회에서 용아장성을 1971. 8월 초등 후, 1972. 1월 동계 초등.

피에몽 송준호 선배의 영향을 받아 요델산악회 가입 후 용아장성에 매료.


그후에도 그가 용아장성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1982년 그곳에서 함께 등반 중 추락사한.,김문환

동료인 그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지점은 용아장성  1봉(옥녀봉) 아래 개구멍바위.

일단 들어서면 뒤돌아 나올 수 없는 산악사고 다발지역 

용아장성 들머리는 수렴동대피소이고., 날머리는 봉정암.

 

수렴동대피소와 봉정암에서 거주하며 용아장성에 신 루트 개척.

평소, 석주길을 즐겨 다녔던 그는 설악에서 인명구조 및 개척 등반.

외설악 적십자 구조대와 울산암 구공길 등반 중 자일이 끊어져.,추락사.

 

설악의 울산암을 오르다가 영원한 바람으로 돌아간.,고 김재중

...................................................................................


그가 <가야동 선녀>를 구한 일화는 .,'설악산의 전설'.

 

꽃다운 나이에 봉정암 절벽에서 달밤에 투신했을때
그녀의 목숨을 구해낸 은인이 이경수라는 설도 있지만
정작 그녀의 목숨을 구해낸 남자는.,'봉정암거사' 김재중

 

가야동 토굴에서 머물며 밤마다 그가 늘 지켜본.,용아장성 암봉.

그는 재빨리 달려가 그 여인을 들춰업고 수렴동 대피소로 뛰었다.

그 도중에 수렴동대피소 산장지기가 파놓은 토굴로 들어가 응급조치.

   
투신을 기도할 만큼, 속세와의 인연을 끊으려 했던., 그녀.
은인에게 목숨을 구해 주었으면, 책임지어 달라고 했던.,그녀.

그녀를 수렴동대피소 산장지기에게 맡겼던.,봉정암 거사 김재중.


그녀에게 하산을 권유한.,이 경수 .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그녀.

그는 본부인의 허락을 받고나서.,동거.


비경의 계곡을 찾아서(22).. 설악산 가야동계곡 2011.6.18~19 

                                                                    설악산.,가야동계곡


설악산 내설악 쪽의 수렴동 계곡을 지나

왼쪽으로 들어가면., 가야동 계곡이 나온다.

'봉정암~ 오세암' 1시간 도보거리.,가야동 계곡


가야동 계곡은 구곡담 계곡과 함께

내설악을 대표하는 계곡으로 특히나

천왕문 일대의 협곡과 가을 단풍이 유명.


낯선 남녀도 함께 목욕하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연인(戀人)들의 명소.,가야동계곡.


내설악산행[가야동계곡-봉정암-구곡담-수렴동계곡] / 2005.10.20 

가야동계곡 & 수렴동대피소

설악산 구곡담 계곡 수렴동 대피소 

 

 

'수렴동 대피소 산장지기'와 <가야동 선녀>


속초의 큰부인은 수렴동 산장지기 뒷바라지가 곤란했던 탓일까?
그녀가 그곳을 벗어나면 자살할까봐 구도자적 자세의 배려 였을까?
결국, 그녀는 수렴동대피소에 머물며 설악산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요 뒤 가야동 계곡에 가면 제가 파놓은 토굴이 하나 있읍죠.

오전 1시에 어김없이 동쪽을 향해 좌정한 산신령이 나타나는

그 토굴에 어느날 선녀 같은 아가씨.,그 선녀가 제 작은 처입니다. "

 

"제 나이 절반도 안됐지만

벌써, 아이 둘을 낳았지요.

아! ~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좋은 약초 산삼은 팔지 않고 복용했다는 약초꾼.

90년대 초 지천명 나이에 80kg 쌀가마를 짊어지고

내설악을 넘나들던, 불가사의한 힘의 소유자.,이경수.

 

조난자 50명 목숨을 구하고

시신 30구를 찾아낸.,약초꾼.

 

“산 사람은 지계 위에 제대로 업어,

다시 밟고 살아갈 땅을 보여줘야 하고,
이미 죽은 조난자에게는 다시는 보지 못할

이승의 하늘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게 업어야죠.“

 

조난자가 그의 지계에 제대로 업힌다면.,이승.
등돌려 업히면,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은.,저승.                    

 

1970년 무인 대피소로 지어진 뒤

1972년부터 그가 들어와 줄곧 관리했다.
1964년 군복무를 위해 내설악에 들어왔던 그.

 

그후 백담사와 오세암, 봉정암에서 지내다가

인제군청으로터 수렴동대피소 관리를 위탁받아

수십년간 수렴동대피소를 관리했던 산장지기 이경수.

 


2011년 국립공원에서 옛 수렴동대피소를 철거.

그 자리에 현대식 수렴동대피소를 신축해 운영.

옛 수렴동대피소의 정취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평생 인명구조에 몸 바친., 약초꾼 이경수.

그와 <가야동 선녀>를 맺어 준., 인연으로

그가 산신령처럼 떠받들었던.,<봉정암 거사>.

 

무소유의 삶을 몸소 실천으로 행했던.,불자.

벽이 좋아 벽에서 살다 간, 故 김재중 산악인

 

평생, 결혼과 취직을 거부했던.,故 김재중 산악인

바람처럼 살다가 1989년 9월 바람처럼 사라진.,<봉정암 거사.>

'용아장성 1봉' <옥녀봉>에 부착된.,요델산악회 추모동판.,주인공.



용아장성-1봉 

                                      용아장성 1봉 '개구멍바위' 위에.,추모동판


만약, 고인이 된 그들이 없었다면

<봉정암거사>와 <가야동 선녀>비화.

전설 같은 <석주길의 비화>도 없었을듯..

 

 

1960/70년대는 산악인들에게 암울한 욕구불만 시대.

 

히말라야 원정대 꿈을 안고 설악산 인명구조대에서 활동

최소한 생계유지, 등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관광 가이드.

수학여행, 신혼여행, 꽃단풍 시즌마다 설악 비경을 맴돌며.,안내.

 

설악산 관광 가이드는.,국내 상업 등반 원조



1950. 6.25 전란 평정 후, 개척등반에 나선 산악계 선구자들.

이들 대부분 유명 의사, 체육인,학자 지도자 부유층 명문 가문

1960년대 들어와서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등지에서 개척등반 붐.

 

1960년대는 빈부격차 갈등이 극렬한 시기였다.

등산은 부유층 신선놀음으로 여겼던 국민적 정서.

서민 대다수에게는 질타의 대상이 되었던 등산문화.

 

그당시 구로공단 가발공장 수출의 역꾼인 여공 일당이 1$

외화를 막대한 해외원정대 경비로 쓰기 어려운 사회적 여건.

1960년대 해외원정 꿈이 좌절된 산악인의 불만 돌파구.,설악산.

 

운좋게 1969년 히말라야 원정대 후보로 뽑혀 동계훈련 중

불운하게 2.14. 죽음의 계곡 눈사태로 목숨잃은 십동지 묘.

그 한국 산악회 소속 대원 10人 무덤을 포함한.,산악인 묘지

 

설악산에서 숨진 산악인들 '死者의 마을'.,설악동 노루목.

 

산악인들 무덤엔 대부분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도 제대로 없었다.
벚꽃처럼 활짝 필 젊은 나이에 산에서 운명을 달리한.,死者의 마을.
자일파트너 두 사람을 그곳에 묻고 홀로 남아 그리움 달래던, <송준호>

송준호가 친형제 만큼이나 아낀 의형제이자 연적, 엄홍석.
엄홍석 만큼이나 사랑했던, 송준호 마음속의 연인, 신현주.
두 사람 행복을 위해 자신이 잠적한 사이.. 일어난 산악사고.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엄홍석과 신현주를 지켜주었을텐데..
송준호는 그런 속마음을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그가 개척한 석주길에는 송준호의 그런 속마음이 담겨있다. 

송 준호는 1969년 늦가을 천화대에 바윗길을 개척 후
개척자가 새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고유권한 관례에 따라
고인이 된 두 사람을 못 잊어., 석주 길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엄 홍석., 석 字
신 현주., 주 字를 따서
명명한 바위길 이름.,석주길.

.

........................................

.........................................


 

개척완료 일자 :1969년 10월 7일 
석주 死後 2달 만에 완성된 바위길.



공룡능선 1275봉에서 뻗어내린 20 여 암릉.,천화대.

잦은바위골과 설악골 사이 '천상의 화원'같은.,천화대.

잦은바위골과 설악골은 석주와 송준호의 추억이 담긴 곳.

 

송준호가 그 추억의 장소들을 이어 개척한.,석주길.

 

피에몽 광성 고교시절부터 자일 파트너.,송준호, 나경봉,엄홍석.

요델에서까지 함께 활동하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절친한 악우들.

송준호와 석주는 서로 목숨을 믿고 맡길 만큼 신뢰 깊었던 자일 파트너.

 

'환상의 콤비' 동갑나기 셋은 바늘과 실처럼 함께 다녔다.

세 사람은 자일파트너이자 의형제, 연인처럼 가까웠던 사이.

세 사람은 어느 한사람이라도 없어서는 안될 만큼 소중한 관계.

 

설악골과 잦은바위골 사이로 솟아오른.,희야봉 칼날 암릉.

그곳에 서면, 엄홍석과 신현주와의 옛 추억들이 되살아나는 곳

송준호는 석주를 못잊어 군 복무 중에 휴가 때마다 석주길을 개척.  


송준호는 석주길을 오고 가며.,

석주가 없는 그곳에 홀로 남아 

과연, 무슨 생각에 젖어 있었을까? 

 

석주와 함께 늘 토왕 빙폭 초등의 꿈을 품었던.,송준호.

1972년 12월 중순 잦은바위골 100m 빙폭을 30분 만에 등반.

자신감을 갖게 된 송준호는 석주의 영전 앞에 두번 절하고 맹세.

 

"석주야. 이제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작은 케룬을 쌓고

두 사람 만을 위한 피켈을 꽂아주마."

 

- 송준호의 맹세 -

그 후 송 준호는 1973년 1월 2일 토왕성 빙폭 초등 도전 중.
실족사고로 인하여 먼저 간 두 岳友의 영혼을 뒤따르게 되었고
훗날 송 준호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가 남긴 편지 한 통이 발견된다.

그당시 토왕폭을 오른 사람은 없었기에 초등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
송준호가 토왕폭을 오르기 전날 밤이라, 그의 심경이 가득 담긴, <편지>.
송준호가 이미 고인이 된, <엄홍석과 신현주> 영혼에게 보낸...., 묘한 편지.

....................
받는 이 : 석주
주 소 : 목

보내는 이 : 준
주 소 : 벽에서
....................


잘 있었나.
그동안 나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네.
내일 벽과의 감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
.
.

(이하 중략) 

 
송준호는 총 300 m 높이의 토왕폭 상단에서 추락했다.
토왕폭 허리에서 확보를 보던 후등자의 본의 아닌 실수.
선등으로 오르는 송준호를 뒤따라가기에도 벅찼던 후등자. 

확보 중 몸의 중심을 잃고 자일을 당기며 추락하다가 정지.

그 충격으로 송준호 역시 중심을 잃고 후등자와 동시에 추락.

빙폭의 확보물이 터져나가며 송준호는 허공으로 새처럼 날랐다.

 

선등자 송준호는 토왕폭 상단에서 하단까지 추락. 

토왕폭 초등 기록을 엄홍석과 신현주 영전에 받치려던 꿈도 물거품.
토왕폭 아래까지 굴러 떨어진 송준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석주가 죽은 1969.8.7 이후 3년 3개월 만에 발생했던.,1973.1. 2 산악사고.

 

최후까지 몸의 중심을 잡고, 추락에 제동을 걸었던 피켈.

송준호가 허공을 날기 직전 사력을 다해 빙벽에 찍었던 피켈.

그 피켈은 송준호가 추락한 후에도 빙벽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지금 셋은 나란히 노루목에 묻혀 있다.
언제나 늘 함께 있고싶어 했던 세 사람.
생전에 못 이룬 꿈이 사후에 이루어진다.

 

신현주가 가운데 눕고

그 좌우에 나란히 잠든

엄홍석, 신현주, 송준호


설악가의 전설 훼미리 



아래는 '노루목 묘지'의 충혼비

그 전면에 새겨진.,3동지.,추모 글. 



노루목에서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이 될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그 대담한 의지로
그대들은 설악에서 회생하리라.


 

1973년 2월 18일

요델 산악회


.............

.............


'37년 만에 삼동지 묘' 재 정비 완료.(2006.10.16)

충혼탑과 삼동지의 비석 위치를 같은 선상에 맞춰

많은 사람이 참배할 수 있게 여유있는 공간을 확보.

 

'엄홍석, 송준호, 나경봉은 고교 시절부터 3총사 악우.'

"먼저 간 두 악우를 추모하는 일은.,홀로 살아 남은 자의 몫."

"노루목에서 다시 뭉치세. 나도 그 곁으로 갈께." - 나경봉 산악인 -                       


[알피니스트 비망록] 요델의 이름없는 투사 나경봉 

                                           2013.6.24. 나경봉 산악인

출처 : 홍익대총동문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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