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쉬 마을
전기도 자동차도 없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전화도 없다.
밤에는 등불을 켜고 여전히 말과 쟁기로 밭을 갈고 마차를 타고 다닌다.
미국땅에서 살지만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다.
3대가 한집에 사는 대가족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연방정부의 의무교육을 마다하고
스스로 학교를 세워 산술과 성경 등 기초과목만을 8학년까지 가르친다.
그들은 최첨단을 향해 질주하는 21세기에 살면서도 18세기식 삶을 고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현대문명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빠르고 새롭고 편리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리고 단순하게 사는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은 18세기 수준의 문명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현대문명은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미쉬인들은 계속 번창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인구가 두 배로 늘었다.
북미 전역에 흩어져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아미쉬인은 2000년에 144,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원래 아미쉬인들은 독일, 스위스, 알사스(독일과 스위스 경계에 위치한 프랑스 지역으로
독일 사투리를 쓴다)에서 살던 사람들로, 심한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1737년, 아미쉬인은 최초로 미국에 도착하여 펜실베이니아 주 랭카스터 시에 정착했다.
1815년에서 1860년 사이에 또다시 이주의 물결이 이어졌고,
아미쉬인들은 아이오와 주를 포함해 20개 주로 퍼져나갔다.
욕설이나 폭력에도 침묵으로 답하는 사람들
아미쉬 신앙은 스위스 재침례파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재침례파 운동은 종교개혁에 불만을 품은 개혁가들이 시작했다.
아미쉬란 이름은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재침례파 목사 야콥 암만 Jacob Amman을 따르는 이들이 붙인 것이었다.
암만 목사는 더 엄격한 개혁을 주장하다 1693년 다른 재침례파 교인들에게 파면을 당했다.
믿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가 청소년기를 지나 교회생활에 대한 책임감을 깨달아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세례서약은 보통 16세에서 18세 사이에 하는데, 그때 젊은이들은 죽는 날까지 교회와 공동체의
규율을 따르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한다.
아미쉬인들은 예수의 삶과 산상설교를 모범으로 삼아 일상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 형제애를 중시하며 세속과 분리된 채 절대로 폭력을 행하지 않고 겸손하고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대주라’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외부인들의 공격을 받더라도(외부인들이 아미쉬인을 괴롭히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아미쉬인들은 반응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리고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많은 아미쉬인들이 감옥에 갔고 2차대전 때는 심한 탄압을 받았다.
신앙에 따라, 선거를 하지 않고 정부 일에 참여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들에게 잘못을 하더라도 법에 호소하지 않는다.
아미쉬인들은 선교 활동을 하거나 외부인을 설득하여 아미쉬 신앙을 갖게 하지 않는다.
아미쉬교도들은 아미쉬 신앙관을 체득하기 위해 심도 있는 훈련을 받고 ‘세상의 빛’이 되길
열망하며, 아미쉬 젊은이들에게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지만 이방인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미쉬인이 아닌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눈에 튀는 특이한 외양을 갖추고 전통적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종교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하여 겪어야 했던 고난과 은둔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음을 알고, 이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1) - 종교개혁과 재세례파의 등장 -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그들의 박해와 은둔의 역사는 16세기 초 종교개혁의 소용돌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럽은 관습적으로 가톨릭의 로마 교황청 교회로 단일화 되어 있었고, 종교(교회)와 정치(정부)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영적 구원’이라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선 교회의 권세에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로마 교황청 교회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점점 권위를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1517년에 이르러 독일의 가톨릭 수사(修士) Martin Luther는 '구원은 개개인의 깊은 신앙심에 대한 은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결코 교회의 성례전(聖禮典)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며, 교황청 교회의 구조와 교리에 대한 일대변혁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에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동조하며 일게 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독일 제후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때마침 창안된 인쇄술의 실용화에 힘입어 유럽 전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Pennsylvania 주 Lancaster에 있는 Mennonite Information Center의 전시물 중에서) 이때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신교의 목사인 Ulrich Zwingli가 지도자로 떠올라 개혁파 교회(the Reformed Church)를 설립하는 등 종교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모든 면에서 Luther보다도 더 적극적인 개혁 성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 Zwingli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 땅 위에 신의 왕국은 오로지 정치적 힘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쟁점이 되었던 유아세례(infant baptism)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시 의회와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며 개혁의 순수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추종자들이 나서 종교개혁은 정부의 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개혁의 투명성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지만 Zwingli와 시 의회에 의해 거부되자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완전 분리’ ‘무저항 평화주의’와 ‘성인세례(adult baptism)’를 근본 교리로 내세우며 1525년에 ‘스위스 형제들(Swiss Brethren)'이라는 새로운 교파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정부 관리들은 당시 세금 징수를 위한 신생아 출생의 유일한 근거로 삼던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군 징집을 거부함으로써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며 모임을 중지하고 ‘유아 세례’를 지속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신생아의 경우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이 없고, 따라서 지은 죄악 또한 없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이루어지는 유아 세례는 의미가 없으며, 그 대신 성인이 된 후 이성적 판단 하에 이루어지는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세례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며 당국의 감시를 피해 성인 교도들에 한하여 새로운 세례식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연유에서 그들은 ‘재세례(재침례)파 (anabaptists 또는 re-baptizers)’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였다.
(자료: ‘The Martyrs Mirror’에 실린 사진 재편집) 재세례파 교도들은 그들이 보인 급진적인 개혁성향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큰 흐름 속에 ‘개혁자들 중의 개혁자’로 인식되어졌으며, 나아가 정부 관리와 가톨릭은 물론 여타 개신교파의 교도들로부터 까지 법질서와 종교적 일체감을 해치는 반사회적 위험 집단으로 지목되면서 마침내 그들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정부 관리들은 재세례파의 지도자는 물론 일반 교도들까지 색출하여 잡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개종을 강요하며 갖은 고문과 함께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뿐만 아니라, 뜻을 굽히지 않는 교도들은 추방하거나 노예로 팔아 넘겼으며, 화형(火刑)이나 수장(水葬) 심지어는 생매장과 전신을 토막 내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몇몇 도시에서는 잡아들이는 재세례파 교도들의 인원에 비례하여 보수를 지급하는 ‘재세례파 사냥꾼(Anabaptist hunters)'를 고용하여 그들을 추적케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그들의 신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감시의 눈을 피해 인근 Moravia, Alsace, Palatinate 지역이나 네덜란드 등으로 넘어가거나 깊은 산속 또는 외딴 지역으로 숨어들어가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교도들의 집을 전전하거나 산 속 동굴에서, 또는 어두운 밤 배 위에서 몰래 예배 모임을 가지며 그들의 교리를 확산해 나갔다. 이 때 자행된 잔혹한 탄압과 박해로 인하여 희생된 재세례파 지도자와 교도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 수는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순교에 관한 구체적 사례는 1660년 네덜란드에서 발간된 책 - 'Martyrs Mirror' - 에 고스란히 담겨졌으며, 1,200 페이지에 이르는 거대한 분량의 이 책은 오늘 날까지 아미쉬는 물론 재세례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교파의 교도들에게 전해지며 읽혀지고 있다.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2) -‘메노나이트 Mennonite’와 ‘아미쉬 Amish’의 태동
끊임없이 이어지는 감시와 박해 속에 곳곳으로 흩어진 재세례파의 지도자들이 1527년 스위스와 독일의 국경지역에 있는 Schleitheim에 모여 비밀 회합을 가졌다. 그들은 재세례파 분리의 근간이 되었던 'Brotherly Union(형제의 동맹)의 선언’을 보다 진전시켜, 재세례파 교리를 확고하게 밝힌 'Schleitheim Articles(슬라이타임 조약)'를 채택하였다. 이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일곱 개 항목이 담겨져 있으며, 이는 아미쉬 교도들의 기본 교리가 되어 오늘 날까지 그대로 지켜져 오고 있다. - 유아 세례의 반대와 성인 세례의 실행 - 잘못을 저지른 교도들에게 대한 경고와 파문의 실천 - 세례를 받은 교도에 한하여 성찬식 참석 허용 - 외부 세상의 악으로부터의 격리와 폭력의 거부 - 교회 사역들의 품위 있는 인격과 교도들을 감동시키는 설교 - 정치와 종교의 분리, 공공 사무실 유지나 공직 종사 금지 - 교도들에 대한 서약을 지양하고 언약을 중시
(자료: www.swissmennonite.org의 사진 재편집) 그러한 모임이 있은 이후에도 박해를 피해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며 이어진 은둔 생활의 영향으로 재세례파에는 전면에 나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으며, 1536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가톨릭 사제 출신으로써 개종을 한 Menno Simons(메노 시몬스)가 재세례파에 널리 알려진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곳곳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재세례파 그룹들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주력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재세례파의 교리를 확산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 각 교파의 지도자 이름을 따 교파들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있었던 영향으로 재세례파들에게도 지도자 Menno Simons의 이름을 따 ‘Mennists' 'Mennonists' 또는 ‘Mennonites’등 다양한 이름이 붙여졌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Mennonites'로 일반화 되었다. Menno Simons가 세상을 떠난 후 70여년이 지난 1632년에 메노나이트의 지도자들이 네덜란드의 Dordrecht에 모여 재세례파의 교리를 재정리하고 명문화하였다. ‘Dordrecht Confession of Faith (도르드렉트 신앙 고백)’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기록에는 Trinity(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믿음, 예수의 강생과 속죄, 성경 우선,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등 그들이 믿는 신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성인 세례, 성찬식과 세족례의 실행 등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여기에는 비순응주의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하던 당시의 여타 교파들과는 달리 잘못을 저지른 교도들에 대한 징계 수단으로 기피(shunning)와 파문(banning) 등 비폭력적인 처벌 방법을 정한 ‘Meidung(마이덴: shunning의 뜻을 가진 독일어)'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징계 조치는 죄를 지은 교도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고, 공동체내 다른 교도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차단하며, 공동체의 신망을 지켜나가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모든 교도들은 징계를 받은 자가 회개함으로써 처벌이 철회될 때까지 함께 식사하는 것을 포함하여 일체의 의사소통과 접촉을 한시적으로 차단토록 하였다.
(자료: Alsace-USA, www.alsace-usa.com 사진 재편집)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노나이트 교파 내에도 또 다른 보수지향적 개혁 그룹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스위스 메노나이트 교회의 젊은 장로 Jacob Amman(제이콥 암만: 일부의 문헌에는 Ammann)과 그를 따르는 소그룹의 추종자들은 메노나이트 교파가 당초의 교리에서 벗어나 또다시 세류에 따라 흐르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Menno Simons의 저술 내용과 ‘Dordrecht 신앙 고백’에 담긴 교리를 보다 철저하게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해석을 위한 친교의 모임을 매년 1회에서 2회로 늘리고, 세족례를 철저히 실행하며, 교회의 규율을 어긴 교도에게 대한 기피와 파문을 보다 엄격하게 집행하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특히 그들은 교회의 순수성 확립을 위해서는 징계 받은 자에 대한 완전 격리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여야 하며, 따라서 징계 받은 자에 대하여는 배우자라 할지라도 그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잠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메노나이트 지도자들은 그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마침내 Jacob Amman은 추종하는 교도들과 함께 Alsace 지방에서 또 다른 분파를 이루어 나갔다. 지도자 Jacob Amman의 이름을 따 ‘아미쉬(Amish)’라 이름이 붙여진 그들은 몇 년이 지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메노나이트 본류에 합류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독자적인 종파를 이루어 나갔다. 하지만 분리된 이후에도 아미쉬 교도들은 모든 면에서 뿌리를 같이하는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메노나이트 본류와 상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요관심사에 관하여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한 상호 유대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늘 날 대부분의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아미쉬를, 또한 아미쉬 교도들은 스스로를 ‘메노나이트의 가장 보수적인 사촌’이라고 여기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 기금 모금 행사장에 나온 메노나이트 여인들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2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3) -'거룩한 실험의 땅',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로 -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의 식민지 건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할 즈음, 종교적 박해는 물론 흉작으로 인한 생계유지의 어려움, 끊이지 않는 전쟁과 징집, 그리고 높은 세금 등으로 시달리고 있던 유럽인들은 ‘꿈의 대륙- 아메리카’로의 이주를 꿈꾸기 시작하였다. 때맞춰 그들에게 날아 든 기쁜 소식은 신대륙에 건설된 식민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로부터였다. 자메이카를 정복하였던 영국 해군 제독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의 아들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 채권으로 얻게 된 신대륙의 광활한 땅에 1681년 식민지를 건설하고 ‘Penn의 숲(sylvania)’이라는 뜻을 가진 Pennsylvania로 명명하였다. 독실한 국교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퀘이커교도(the Quakers)가 되어 스스로 종교적 박해를 경험한 William Penn은 펜실베이니아 땅 위에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지상의 낙원’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꿈을 알리기 위하여 식민지내 정착민들에게 종교적, 정치적 자유의 보장은 물론 이주자들에게 가족 수에 비례한 토지의 무상공여와 저렴한 가격으로의 양도 등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담은 안내 책자를 발간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이를 알리는 열성을 보였다. William Penn은 이러한 ‘이상향(理想鄕)’ 건설에 기울이는 자신의 노력을 ‘거룩한 실험(the Holy Experiment)’이라 불렀으며, 퀘이커 교도들은 물론 아미쉬, 메노나이트 등 독일계 재세례파 교도들이 ‘거룩한 실험’의 대상이 되기를 자청하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이주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자료: http://www.quaker-tapestry.co.uk 에서 옮김)
아미쉬 교도들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에 관한 기록으로는 1736년에 Detweiler 와 Sieber 의 성(姓)을 가진 두 가족이 Pennsylvania 주 Berks County에 최초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아미쉬 전문가들은 그보다 빠른 1720년 경 Pennsylvania 주 Lancaster County에 최초로 정착한 것으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아미쉬들의 신대륙 이주는 크게 두 차례로 나뉘어 이루어졌으며, 1차 이주는 1720년부터 1770년까지. 2차는 1817년에서 1880년 사이로 비교적 많은 인원이 이 시기에 이주하였다. 1차시기 초기에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모두 지금의 Pennsylvania 주 Lancaster, Chester, Lebanon, Berks County에 정착하였으며, 이 지역이 정착지로 택해진 이유로는 이주민들이 처음 도착한 항구 필라델피아에서 내륙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일 뿐더러, 기후와 토양 등 자연환경이 아미쉬 교도들의 전통적 삶의 근본인 농사에 적합하고, 특히 이주 전에 살았던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농촌 환경과 매우 흡사한 데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차시기 후반에 이주한 아미쉬들의 일부는 Pennsylvania 주 중부지역인 Mifflin County와 남서부 지역인 Somerset County까지 들어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아미쉬 교도들의 2차 이주는 1차시기보다 수적으로 많은 약 3,000명 정도의 아미쉬 교도들이 이주하였으며, 이 때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에 정착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Illinois, Indiana, Iowa, Missouri, New York, Ohio 주와 캐나다의 Ontario 주에 정착하였다. 이 때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단추가 달린 코트를 입고, 마차에 장식을 하거나 피아노를 소유하고, 치장된 가구와 무늬가 있는 접시를 사용하는 등 1차시기에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에 비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개방적이고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교리의 해석이나 종교의식과 일상생활에서도 보다 유연성을 보이며 공동체 모임별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Lancaster County Gap에 보존되어 오고 있는 'William Penn Rock'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4) - 끊임없는 마찰과 분란 -
‘거룩한 실험의 땅’ 펜실베이니아 주를 시작으로 ‘꿈의 대륙’아메리카 곳곳으로 이주한 아미쉬 교도들은 유럽에서 받았던 탄압과 박해의 고초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신앙적 터전을 마련해 나가는데 따르는 시련과 역경은 신대륙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시련과 역경은 크게 ‘교파 밖의 외부 세계와의 마찰’과 ‘소리 없이 이어진 교파안의 분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재래적인 방법으로 밭을 갈고 있는 아미쉬 교도 (Pennsylvania 주 Lancaster 지역)
외부 세계로부터 받은 시련은 주로 그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삶의 관습과 외부의 환경, 법과 제도, 그리고 일반적 사회 관습 등과의 상충에서 야기되는 문제들로써, - 비폭력 평화주의에 따른 무저항과 전쟁 참여 거부, - 정부 조직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정부 기능의 제한적 수용, -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일상관습과 상충되는 사회제도의 수용 거부, - 문명화와 도시개발에 따른 전통적 삶의 기반 위축 등이 그 주된 요인이 되었다.
(Pennsylvania주 Mifflin 지역)
내부적으로는 이주시기와 정착지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변화의 욕구를 표출한 공동체들을 효율적으로 통괄 조정할 수 있는 단일 협의체 구성에 미온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교도들의 공동체 단위 이탈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교파의 결집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 교파 밖의 외부 세계와의 마찰 >
Pennsylvania 주에 정착한 아미쉬 교도들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으로 1755년부터 1763년까지 있었던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에서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음을 들 수 있으며, 독립전쟁 당시에도 반전 평화주의와 중립주의를 고집한 아미쉬 교도들은 독립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국 황실에 충성을 다짐한 세력 양측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1720년경부터 30여 년간 미 대륙 식민지를 휩쓴 개신교의 부흥운동 당시 아미쉬 교도들은 침례교(Baptist), 감리교(Methodist), 모라비아파(Moravian) 등 개신교파의 순회 목사와 전도사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아미쉬 공동체는 많은 교도들이 공동체를 이탈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1861년부터 5년 동안 지속된 남북전쟁 중 징집을 거부한 아미쉬 교도들은 징집 유예를 받는 대신에 당시로써 거액인 1인당 300달러씩을 납부하여야만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구촌 전쟁에 주도적 역할을 한 미국으로써 수차례에 걸쳐 강행된 징집에 아미쉬 교도들은 반발하고 불응하였지만 일부 젊은 아미쉬 교도들이 전쟁터로 내몰리는 상황에 처했다.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끈질긴 저항 끝에 아미쉬 교도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 지위를 확보하였지만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대신 ‘대체 복무’를 위해 많은 젊은 교도들을 일정기간 공동체 바깥세상으로 떠나보내야만 하였다. 그로써 상당수의 젊은 교도들이 복무를 마친 뒤 공동체로 되돌아오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1,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계 미국인들이 받은 의심의 눈초리와 반독일 정서에서 아미쉬 교도들 또한 벗어날 수 없었다.
자녀들에 대한 고등학교까지의 의무 교육 이행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신앙적 삶의 보호와 가치관의 확립을 위하여 자체적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아미쉬 학교 운영을 주장한 아미쉬 교도들은 197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법적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주 정부로부터 피소를 당하고 벌금, 징역 등의 처벌을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1955년부터 실시된 미국 내 ‘사회 보장 제도(Social Security Program)’에 대하여도 아미쉬 교도들은 그들의 공동체내 이미 뿌리 내려져 있는 자체적 상호 부조와 협조 정신에 상치되는 불필요한 제도로 여겼으며 정부 주도의 그러한 제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며 이에 대한 세금 납부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연방정부로부터 농지, 주택 등의 가압류 조치는 물론 밭을 갈고 있던 말과 농기구를 압수당하고, 강제 경매처분을 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어야 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은 아미쉬 교도들은 끈질긴 노력을 통하여 의회로부터 Medicare와 Social Security로부터 예외로 하는 결의를 얻어냈다.
근래 들어서는 공장 건설과 택지 개발 등으로 농경지가 침범 당하고 또한 농지 가격의 상승 등으로 전통적 삶의 기반을 위협받는 아미쉬 교도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미개발 벽고지로 떠나가야 하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질 숭상, 쾌락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 이웃의 일반인들과의 관습 차이가 커지면서 불거지는 크고 작은 시비 거리와 그들의 삶에 호기심을 보이며 눈요기를 찾아 자신들의 안마당까지 밀려들어오는 관광객들로부터의 사생활 침해, 그리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극성을 부리는 관광업계 등의 상업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 소리 없이 이어진 교파안의 분란 >
아미쉬 공동체는 이주 시기와 정착지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긴 하였지만 2차 이주가 한창 진행 중이던 1800년대 중반까지는 비교적 결집된 교파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뒤이어 이주해 온 교도들의 진보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하였고, 1849년에 이르러 가장 보수적인 공동체로 알려진 Pennsylvania Mifflin County 공동체 교도들이 이탈하여 여타 공동체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아미쉬 교파 내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교리와 관습을 지키고 공동체들의 결집을 위하여 1862년에서 1878년 사이에 개최지를 옮겨가며 여러 차례 지도자 회의를 가졌다.
이러한 일련의 지도자 회의를 통하여 메노나이트 교도가 아미쉬 공동체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고, 다른 종교나 개신교의 다른 교파에 합류한 자에 대하여는 추방하며, 사진의 금기와 군복무 거부 그리고 기타 비밀단체 등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결의하는 등 각 공동체 간에 조화를 이루어 가는 듯 하였다. 하지만 전통적 관습을 고수하는 보수파와 시류에 보다 개방적이기를 바라는 진보파간에 보이는 틈을 좁히지 못하였으며, 진보파 내에서도 교회 건물을 세우는 문제, 실용화되는 문명의 이기에 대한 수용문제, 용모와 복장 문제 등에 관한 세부적인 실행에 있어 각가지 다른 의견들이 표출되면서 진보적인 경향을 보인 공동체들이 하나 둘씩 주류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1880년 경 아미쉬 교파는 1개의 보수파와 4개의 진보파 그룹으로 크게 분리되는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보수파 그룹은 ‘the Old Order Amish'라 불리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이후부터 지도자회의에 참석을 거부하고, 아미쉬 교파의 정통성을 고수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으면서 오늘 날까지 실질적인 아미쉬 교파의 본류로써의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나머지 진보파 그룹에 속하는 'the Amish Mennonite'’the Egly Amish' 'the Stuckley Amish' 'the Sleeping Amish' 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는 Mennonite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the Old (Order) Mennonite'에 합류하였으며, 일부는 Mennonite 본류에 흡수되었다. 그 이후에도 1927년에 Pennsylvania 주 Somerset에서 ‘the Beachy Amish'가, 그리고 1966년에 Pennsylvania 주 Lancaster에서‘the New Order Amish'가 ‘the Old Order Amish' 본류에서 떨어져 나오는 등 진보적 경향을 띤 공동체들의 이탈이 이어졌다.
(Pennsylvania 주 Lancaster 지역)
아미쉬 Amish, 그들의 종교 (1) -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극보수 기독교인-
아미쉬 교도들은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개혁자들 중의 개혁자’로 불리어질 정도로 과격한 개혁주의자로 인식되었지만, 그들이 주장한 개혁의 실질적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교회의 구조나 운영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외형적인 개혁이 아니라, 잃어버린 원시 기독교 정신을 되찾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순수성을 재확립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변혁의 요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주류임을 내세우는 여타 개신 교파들로부터 눈총과 핍박을 받으며, 때로 ‘이단(異端)’이라든지 ‘사이비(似而非)’로 인식되어지기도 하였고, 그들의 역사와 신앙에 관하여 깊이 있게 이해하려 들지 않고 그들이 보이는 특이한 행색만을 눈요기로 삼으려고 하는 일부 관광객들에게는 이상한 사교(邪敎) 집단으로까지 비춰지고 있지만, 아미쉬 교도들은 온 세상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기독교인으로써, 그들의 신앙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시련을 겪어 오면서도 그들은 결코 기독교인으로써의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미쉬 교도들은 성경의 모든 구절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고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이를 종교의식이나 일상생활에 그대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1세기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오늘날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장치로써 교회와 정부의 완전 분리를 고집하고, 나아가 정부의 필요이상의 기능과 역할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함은 물론, 자신들의 공동체 바깥의 일반 세상과 거리를 두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외부와 격리된 삶을 추구하고 있는 데에는 ‘고린도전서 1장 19-21절’ ‘로마서 12장 2절’ ‘요한1서 2장 15절’ ‘요한복음 17장 14절’과 ‘고린도후서 6장 14절과 17절‘ 등 성경구절에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미쉬 가정에서 사용되었던 1863년도 발간 독일어판 성경책 겉표지와 안표지
뿐만 아니라, 아미쉬 교도들은 성경의 모든 구절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고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이를 종교의식이나 일상생활에 그대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1세기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오늘날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장치로써 교회와 정부의 완전 분리를 고집하고, 나아가 정부의 필요이상의 기능과 역할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함은 물론, 자신들의 공동체 바깥의 일반 세상과 거리를 두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외부와 격리된 삶을 추구하고 있는 데에는 ‘고린도전서 1장 19-21절’ ‘로마서 12장 2절’ ‘요한1서 2장 15절’ ‘요한복음 17장 14절’과 ‘고린도후서 6장 14절과 17절‘ 등 성경구절에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미쉬 교도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관하여 이교도들에게 설파하지도 않으며, 교세(敎勢) 확장을 꾀하기 위하여 이교도들을 자신들의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노력, 즉 전도(傳道)를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구절을 직역하고 일상생활에 있어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고 하는 그들이 ‘온 세상에 나가 신의 모든 창조물에 복음을 전도하라’는 계시를 어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재세례파 교도들은 이들이 교파를 이룬 초창기에는 복음을 전도하고 그들의 교리를 설파하는데 여타 개신 교파들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매우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하여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고 교파의 지도자는 물론 수많은 추종자들까지 죽음에 이르는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전도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 질 수밖에 없었고, 위기감을 느낀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전통적 삶의 모습이 된 조용하고, 평온한 삶의 길을 찾아 숨어들어가 바깥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Hans Herr House & Museum 전시장에서)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진보적인 변화를 가져 온 일반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다시 전도에 나서기 시작하여 전 세계적으로 100만 명이 넘는 많은 교도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발표될 정도로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지만, ‘Old Order Amish’와 ‘Old Order Mennonite’ 교도들은 지금까지도 ‘땅과 더불어 조용히 살아가는 삶의 영유’를 열망하고 있을 뿐, 복음의 전도나 자신들의 교리를 설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미쉬 가정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자라지 않은 일반인이 아미쉬 교도가 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며, 또한 아미쉬 공동체를 벗어나 독자적인 생활을 하면서 아미쉬 교도들과 같은 신앙적 삶을 영위한다고 하는 것 또한 불가능 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언어, 관습, 문화 등을 완전 체질화하지 않은 채 아미쉬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울 뿐더러, 그들의 삶의 기본을 이루는 공동체를 벗어나 아미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미쉬 Amish, 그들의 종교 (2) - 긴 시간의 예배와 주일 하루 -
아미쉬 교도들의 예배 모임은 정기적인 예배 의식일 뿐만 아니라, 교도들의 신앙심을 새롭게 하고, 그들만의 전통을 보존하며, 공동체의 결집을 확고히 하는 교류의 계기로 삼는, 공동체 내의 가장 중요한 정례행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미쉬 교도들의 주일 예배 모임은 격주로 한 번씩, 교도들의 집을 돌아가며 갖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예배 모임이 없는 주일에는 가족, 친지, 친구들을 방문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일부 교도들은 (친척들이 속하는) 다른 교구의 예배 모임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보통 규모의 교구일 경우 아미쉬 가정은 대개 일 년에 한 번 정도 예배모임의 차례가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미쉬 마을의 주택은 외관상 다른 일반인들의 주택과 큰 차이가 없으나 실내 구조는 교구 내 교도들이 함께 모여 앉아 예배를 볼 수 있는 공간 마련을 위하여 - 그 뿐만 아니라, 결혼식, 장례식은 물론 잦은 가족, 친지들의 모임을 모두 집에서 갖는 이들의 관례를 수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 넓은 거실과 붙어있는 다른 용도의 방들이 슬라이더 여닫이로 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용 의자와 성경책, 찬송가집 등은 교구 내에서 공동으로 소유하며 예배가 열리는 집으로 옮겨가며 사용합니다. 이들을 옮기기 위하여 만들어진 마차가 있으며 이를 Church Wagon(교회마차)라고 부릅니다.
예배모임에서 목사의 설교 등 모든 진행은 교도들 간의 일상생활에 통용되는 Pennsylvania Dutch(펜실베이니아 독일어 방언)를 사용하며, 성경은 독일어 판을 사용하고 정통 독일어로 낭독합니다. 그리고 찬송은 일반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미쉬 고유의 찬송집(Ausbund라고 부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1년 동안 매번 예배 모임마다 낭독할 성경과 부를 찬송 등이 담겨진 소책자가 있으며, 성경 낭독은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을 위시하여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을 1년에 완독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아미쉬 교도들은 예배모임이 있는 일요일 아침에는 여느 날보다도 일찍 일어나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젖소 우유 짜기, 가축 돌보기 등 평상시의 아침과 오전 중의 일과를 모두 아침 식사 전에 마쳐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침 식사를 한 후, 단정한 예배 복장을 갖춘 뒤 예배 모임이 예정된 교도의 집과의 거리에 따라 아침 7시-7시 30분 사이에 온 가족이 집을 나섭니다. 예배가 열리는 집 주인과 가족들은 도착하는 교도들을 맞아 타고 온 마차를 정리하고 말들을 마구간으로 데려가 먹이를 주고 쉴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예배가 열리기 전까지 교도들은 남녀, 같은 연령층으로 어울려 인사와 한담을 나눕니다.. 예배 시작 시간이 되면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모자를 벗어 걸고 남성과 여성으로 자리가 구분된 방으로 들어가 등받이가 없는 딱딱한 의자에 앉습니다. 목사와 주교, 집사는 맨 앞좌석에 앉으며, 연로한 노인들에게는 딱딱한 의자대신 편안한 의자에 앉도록 배려합니다.
예배는 8시에 찬송가로 시작되며 찬송가는 악기 연주 등 일체의 반주가 없이 리더가 첫음절을 부르면 모든 교도들이 일제히 따라 부르는 방법으로 30분 정도 이어집니다. 찬송이 끝나면 일반교도 중 한 명의 설교자가 나서 약 30분간 설교를 하게 되고, 그 다음 모두 무릎을 꿇은 채 다소 길게 느껴지는 묵도가 이어지며 이 때 성경이 낭독됩니다. 그리고 난 후 목사의 설교가 약 한 시간 정도 이어집니다.
목사나 다른 설교자는 사전에 준비한 원고 없이 설교를 하며 그들은 설교 중에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끝난 뒤에는 신앙고백, 설교에 대한 보완 설명과 의견 교환 등의 시간을 가지며, 다시 이어지는 기도와 성경 낭독, 찬송 순으로 세 시간 정도 소요되는 예배모임이 끝을 맺습니다.
예배 모임이 끝난 뒤에는 참석한 교도들이 모두 함께 모여 점심 식사를 합니다. 남자 성인교도들은 예배 모임의 자리를 정리하고 식사모임을 위한 테이블을 들여놓고 의자를 재배치하며, 부인들은 음식 차리기를 맡아 합니다. 식사는 한 번에 30-40명 정도씩, 방을 나누거나 남자 어른들부터 시작하여 여러 차례로 나누어 하게 되며 식사 전후에는 모두 다시 묵도를 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가 끝난 후에는 성인 남자들과 여인들, 젊은이들이 각기 다른 곳으로 나누어 자리 잡고 교류의 시간을 가지며 이 때 어린아이들도 헛간이나 밖에 모여 놀이를 즐깁니다.
이러는 동안에 각 가정의 형편에 따라, 특히 젖소 등 가축을 돌봐야하는 가정부터, 한 가족씩 자리를 떠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집에 돌아 온 가족들은 가축들의 먹이를 주고, 우유를 짜는 일 등 밀린 오후 일과를 마친 뒤 저녁 식사를 하고 독서 등 휴식을 취합니다. 아미쉬 젊은이들은 예배모임이 끝난 후 별도로 노래 부르기 모임 등을 젊은이들의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아미쉬 Amish, 그들의 종교 (3) - 후예들이 부르는 순교자의 노래 -
아미쉬 교도들은 여타 종파의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찬송가집과는 체계나 내용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찬송가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찬송가는 노랫말만 있고 악보가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어로 쓰여 있습니다. 악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찬송가의 곡조가 교도들에게 기억되어지고, 400여 년간 전승되어오고 있음은 매우 놀랄 만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찬송의 멜로디는 종교개혁 당시에 종교적으로, 또는 일반 속세에서 불렸던 민속 음악과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s)’의 곡조에서 따 온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구별로 음악적 재능이 있는 교도 몇 명을 선정하여 찬송가별 곡조를 익히게 한 뒤, 찬송을 하는 모임에서 리더가 되어 찬송을 이끌게 한다고 합니다. 한 명의 리더가 찬송가 노랫말의 행별 첫 음절을 선창하면 이어 모든 교도들이 합창이 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오르간 등 일체의 악기 반주가 없을 뿐더러 서로 화음을 넣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아미쉬 교도들의 예배모임에서 부르는 찬송은 150여명의 교도가 합창하는 찬송으로 보기에는 너무 힘이 없고 단조롭게 들리며, 느리고 차분하게 이어지는 낮은 음정의 노래가 처량하게까지 들립니다.
(Hans Herr House & Museum)안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예배 모임 장소 독일어로 ‘견본, 전형, 모범, 화신’ 등을 의미하는 ‘Ausbund’라는 이름을 가진 아미쉬 교도들의 찬송가집은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오래되지 않은 1564년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간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전수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는 개신교도들의 찬송가집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처음 발간 이후 수년간에 걸쳐 수록 내용이 추가되었으며 근래 발간되는 이 찬송가집은 거의 900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양의 노랫말이 수록되어있습니다.
(Hans Herr House & Museum)의 예배 모임 장소에 보존되어있는 미국 내 가장 오랜 된 Ausbund
아미쉬 교도들에게 ‘Ausbund’가 가지는 가치와 중요성은 그들의 종교적 모체인 재세례파의 순교자들이 부른 애달픈 노래가 종교적 유산으로 남아 그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찬송가집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50여 개의 노랫말은 16세기 독일 성채의 지하 토굴에 투옥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재세례파 원로들에 의해 쓰인 것들이며, 노랫말에는 주로 정의를 짓누르는 사악한 세상에 대한 항거와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 당해야만 하는 고초, 그리고 감옥 안에서의 이겨내기 힘든 처절한 고독감 등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가장 긴 노랫말의 경우 각기 13행(行: line)으로 되어있는 35개의 연(聯: stanza)으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로 대부분 노랫말의 길이가 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 모임에서 언제나 두 번째로 부르는 - ‘찬양의 성가(Hymn of Praise)’라는 의미의 - 'Das Loblied' 라는 제목의 찬송은 세 개의 연을 부르는데 무려 15분가량 소요될 정도로 길게 이어지며, 이러한 연유로 아미쉬 교도들이 한 곡의 찬송가를 단번에 끝마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 우리는 외롭고 연약한 양떼 그 마저 얼마 남지 않았네. 우리는 이리 저리 떠도는 유랑자 슬픔과 고통 속에서 어두운 숲 속을 헤매고 있네. 개들에 쫓겨 우리에 갇힌 소리 없는 어린 양들처럼 우리는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네. 수많은 무리들 속에서 그들은 우리들을 가리키며 조롱과 비웃음을 보내네. 그리고 긴 시간동안 날카로운 도끼로 하여금 이교도들을 습격하게 만드네. ” 이렇게 이어지는 애절한 절규를 새기며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오늘의 후예들로써 부르는 찬송에 힘이 실릴 리가 없고, 또한 그 어떠한 반주로 이들의 심정을 추슬러줄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가 처량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입니다.
- 제비뽑기로 선출되는 목사와 집사 -
목사(minister)와 한 명의 집사(deacon)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세 개의 교구를 겸임하여 관리하는 주교(bishop)가 있습니다. 목사는 교구별로 교회 모임을 통하여 교도들로부터 추천을 받은 자 중에서 제비뽑기에 의한 방법으로 선출하며, 일반적으로 기혼자로써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교도들이 목사 후보로 추천됩니다.
아미쉬 교도들 사이에서는 목사가 되는 것을 그다지 영예로운 일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무겁고 힘든 책임이 뒤따르는 사역(使役)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미쉬 교도들은 목사가 되기를 열망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연유로 아미쉬 교도들은 성인 세례를 받을 때 언젠가 자신이 제비뽑기에 의해 목사로 뽑힐 경우 기꺼이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여야만 합니다. 선발된 목사는 목회자 수업을 위하여 신학교를 이수하거나 목회를 위한 특별 교육 등을 받지도 않으며, 목사가 된 후 임무수행에 큰 문제가 없는 한 종신토록 그 직을 맡는 것을 관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는 목회에 대한 급여 등 그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습니다.
목사를 제비뽑기에 의해 선발하는 관행은 ‘사도행전 1장 23-26절’에서 이르는 ‘열두 제자 중 떠나간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제비뽑기로 결정하였다.’는 요지의 성경구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목사의 선발에 관한 일정은 모든 교도들이 미리 기도하고 숙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찬식(communion service)이 있기 최소한 2주일 전에 발표하며 교도들은 목사 후보감에 대하여 서로,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상의하지 않으며, 누가 새로운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각자의 의중을 사전에 밝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긴 시간의 성찬예배가 끝난 후, 모여 있는 교도들에게 목회자로써의 자격과 인격 등에 관하여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 ‘디모데전서 3장’이 낭독됩니다. 곧이어 주교와 목사선발을 위해 지명된 자들이 별실로 들어가고 난 뒤에 이미 세례를 받은 정식 교도들이 남녀 구분하여 연장자 순으로 한 명씩 별실 문 앞으로 가서 자신이 새로운 목사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교도의 이름을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여 세 명이상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교도들이 목사 후보가 되며, 대개 6명에서 8명에 이르는 후보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후보로 선발된 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발된 후보 숫자만큼의 찬송가집이 놓여있는 테이블 앞에 나가 자리에 앉습니다.
놓여있는 찬송가집은 모두 고무줄로 묶여져 있으며 그 중 한 권의 찬송가집에만 ‘잠언 16장 33절(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아께 있느니라)의 구절이 독일어로 쓰인 쪽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목사의 최종 선택은 하느님께서 하심을 다시 깨닫게 하기 위함에서라고 합니다. 후보자들은 연장자 순으로 자신이 원하는 찬송가집을 집어 들게 되고, 앞서 설명한 쪽지가 들어있는 찬송가집을 집어든 후보가 새로운 목사로 최종 선발되게 됩니다. 선발과정의 근엄한 절차와 새로 선임된 목사에 대한 막중한 책임부여로 인하여 새로 선발된 목사의 이름이 발표되었을 때, 선발된 자는 물론 참석한 모든 교도들이 함께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모든 교도들은 자신들을 위해 힘든 짐을 지게 된 신임 목사를 위해 기도를 올립니다.
아미쉬 교도들은 이러한 목사 선발과정을 하느님이 직접 관장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실제로 많은 후보들이 자신이 원하는 찬송가집을 집으려 할 때, 뜻대로 되지 않고 저지당하는 것을 느꼈다고 전하는 경험담들이 아미쉬 교도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고 합니다. 집사(deacon)도 이와 동일한 제비뽑기 방법으로 선출되며, 주교(bishop)는 교구의 목사들 중에서 선임됩니다. 이렇게 선발된 목사와 주교, 집사는 교회 운영에 헌신하며 일반 교도들은 베드로전서 5장 5절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에게 순종하며 따른다고 합니다.
마차 행렬
아미쉬 Amish, 그들의 종교 (5) 재세례파 태동의 핵심 - ‘성인 세례’
아미쉬 교회에서의 세례는 지은 죄악을 씻는 의미로 베푸는 의식일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 스스로 하는 자신의 서약과 참된 신앙인의 규범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 갈 것을 맹세함으로써 완전한 교회의 일원이 되고, 이를 어겼을 때는 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하는 처벌을 감수하겠다고 하는 약속의 증거로써 그 중요성을 가집니다.
따라서 아미쉬 교도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모두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이를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아미쉬 교도로써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율법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고 일깨울 뿐, 이를 평생의 삶의 길로 택하여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맡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미쉬 교도들은 성인 세례의 대상이 되는 나이에 이르러 자녀들에게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공동체 바깥세상의 일상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아미쉬 젊은이들은 공동체 외부 세상으로 나가 아미쉬 공동체내에서 금기시 되어있는 일들을 직접 경험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되며, 그러고 난 다음 아미쉬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되어 평생을 아미쉬 교도로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아미쉬 공동체를 벗어나 외부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미쉬 교도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모두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이를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아미쉬 교도로써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율법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고 일깨울 뿐, 이를 평생의 삶의 길로 택하여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맡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미쉬 교도들은 성인 세례의 대상이 되는 나이에 이르러 자녀들에게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공동체 바깥세상의 일상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아미쉬 젊은이들은 공동체 외부 세상으로 나가 아미쉬 공동체내에서 금기시 되어있는 일들을 직접 경험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되며, 그러고 난 다음 아미쉬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되어 평생을 아미쉬 교도로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아미쉬 공동체를 벗어나 외부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을 젊은이들은 정규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 별도의 장소로 옮겨 학습을 하게 되며, 학습 내용은 주로 오늘 날 아미쉬 교파의 기본 교리의 토대가 된 ‘Dorderecht의 신앙고백(Dorderecht Confession of Faith)'의 내용에 대한 재무장입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세례는 자신의 일생을 건 서약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시간을 가지며, 만약에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가지지 못할 경우 결정을 유보하거나 취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경우 때때로 신청자 중 한두 명이 교회의 일원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밝히고 세례를 보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례식을 갖기 전에 세례 받기를 청한 자들을 그들의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기존의 교도들에게 묻는 절차를 먼저 갖습니다.
그런 다음 여자의 경우 머리에 얹혀있던 기도모자(prayer covering)을 벗기고, 주교(bishop)는 모두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양동이를 들고 있던 집사(deacon)는 컵으로 양동이의 물을 담아 주교의 손에 붓고 주교는 세례를 청한 자들의 머리 위에 세 차례 물을 내립니다. 성부(the Father)와 성자(the Son)와 성령(the Holy Ghost)의 이름으로. 그리고 주교는 “주와 교회의 이름으로 너희들에게 친교의 손을 내미노니 모두 일어나 교회의 참된 일원이 되라”고 말하며 세례의식을 모두 마치게 됩니다. 세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세례를 받는 자들은 물론 일반교도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세례를 받은 교도가 후에 자신의 서약을 깨고 교회와 공동체의 규율을 어겼을 경우 일차 경고를 받게 되며, 그리고도 개선되지 않을 경우 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교도들은 교회로부터 추방당한 자와 접촉을 기피하며, 가족들까지도 식사를 함께 하지 않고 부부간에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아미쉬 공동체에서 가장 두려운 처벌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러한 추방을 당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며, 추방된 교도라도 일정기간 근신을 하고 잘못을 뉘우친 뒤 다시 교회의 일원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이러한 추방과 기피를 엄격하게 실천하고 있는 근거로는 ‘로마서 16장 17절’, ‘고린도전서 5장 11절’, ‘마태복음 18장 15-17절’과 에스켈 33장 9절 등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두 차례의 성찬식과 세족례
아미쉬 공동체 교회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로 나누어 두 차례의 성찬식(Communion Service)을 갖습니다. 성찬식이 있기 전 두 번에 걸친 예배모임에서 ‘Council Meeting'이라고 이름 지어진 특별모임을 가지며 이 때 교회와 공동체 내의 규율과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토의하고, 이와 관련하여 신약과 구약에 나오는 성경구절들의 명확한 해석과 적용에 대한 토론회를 갖습니다. 정규 예배모임과 달리 성찬식과 성찬식 전에 이루어지는 두 차례의 ‘Council Meeting'에는 세례를 받은 성인교도들만 참석하게 됩니다.
성찬예배는 평소보다 다소 긴 목사의 설교와, 성찬의식과 세족례(footwashing)로 인하여 시간이 길어짐으로 인하여 교도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지 못함에 따라 목사의 설교시간에 몇 사람씩 차례로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하여 자리를 떴다가 돌아오곤 한다는 점 외에는 평소의 정규 예배모임과 동일하게 이루어집니다. 정규 예배모임 때와 달리 두세 시간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목사의 설교 도중에 집사는 포도주와 크고 둥근 빵을 준비하여 성찬의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하얀 천에 싸여 있는 빵을 꺼내 교도들이 보는 앞에서 자릅니다. 모든 교도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가운데 주교와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교도들 모두 차례로 빵 조각을 받아 입에 넣고 무릎을 꿇은 다음 자리에 돌아가 앉습니다. 그런 다음 모두 다시 일어나 같은 순서대로 포도주를 받아 마신다음 다시 무릎을 꿇은 뒤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요령으로 모든 남자 교도들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여자 교도들은 다른 방에서 똑같은 요령으로 세족례를 실행합니다. 아미쉬 교도들이 실행하는 세족례는 ‘요한복음 13장 5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성찬식과 세족례가 모두 끝이 난 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남자 교도들은 약간의 돈을 집사의 손에 쥐어 줍니다. 평소 교회의 예배모임에서 일체의 헌금을 하지 않는 아미쉬 교도들이 일 년에 두 차례 성찬식이 있는 예배모임에서만 내게되는 헌금 형태의 기부금입니다. 헌금을 낸 교도의 이름이나 금액은 일체 밝히지 않는다고 하며 교회운영에 경비가 소요되지 않는 아미쉬 교도들은 이렇게 모여진 헌금을 공동체내 위급 상황이 닥쳐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교도들을 돕는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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